수도사들이 부른 “Sound of Silence”를 듣는 순간, 거의 얼어붙은 듯이 꼼짝 않고 노래를 들었다. 멋진 어울림이다. 수도사만큼 침묵의 소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수도원에서 오래 세월 동안 침묵 안에서 영성을 추구해온 내공이 빛을 발하는 듯한, 인상적인 공연이다.
찾아보니 이 노래는 “Gregorian Masters of Chant”라는 그룹이 불렀다. (http://www.gregorian.de/) 거창한 이름, 폼잡는 앨범 자켓 사진, 인기 팝송으로 채워진 목록. 실제 수도사를 초빙하여 부른 것이긴 하지만, 상업적인 의도가 다분하다. 그레고리 성가라는 게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떠랴. 나는 이런 식의 상업적인 기획을 무척 좋아한다. 가야금으로 캐논 협주곡을 연주하고, 대금으로 사이먼과 가펑클의 엘 콘도르를 연주하는, 그런 기획을 좋아한다. 그레고리 성가의 참맛을 모르는 나로서는,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그 맛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해주는 그런 기획을 고맙게 생각한다.
찾아보니 이 노래는 “Gregorian Masters of Chant”라는 그룹이 불렀다. (http://www.gregorian.de/) 거창한 이름, 폼잡는 앨범 자켓 사진, 인기 팝송으로 채워진 목록. 실제 수도사를 초빙하여 부른 것이긴 하지만, 상업적인 의도가 다분하다. 그레고리 성가라는 게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떠랴. 나는 이런 식의 상업적인 기획을 무척 좋아한다. 가야금으로 캐논 협주곡을 연주하고, 대금으로 사이먼과 가펑클의 엘 콘도르를 연주하는, 그런 기획을 좋아한다. 그레고리 성가의 참맛을 모르는 나로서는,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그 맛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해주는 그런 기획을 고맙게 생각한다.
이번에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를 훑어보았는데 이 노래가 의외로 상당히 종교적인 의미로 가득 찬 노래임을 알게 되었다. 이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Hello darkness, my old friend
I've come to talk with you again
Because a vision softly creeping
Left its seeds while I was sleeping
And the vision that was planted in my brain
여기서 "vision"이라는 단어가 까다롭다. 종교적인 맥락에서 쓰인 단어이기 때문이다. 신자가 꿈이나 무아지경에 초월적 존재(예수, 성모, 성인과 같은)를 만나 계시를 받는 종교적 체험을 영어에서 “vision”이라고 부른다. 이런 현상은 중세 기독교에서 보편적이었다. 꿈속에서 성모나 성인을 만나 하늘나라나 지옥이나 연옥을 여행하는 이야기는 서양 중세 문학에서 유행했던 형식이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종교 현상(꿈속에서 산신령을 만난다든지 하는)이 있지만 그 현상을 지칭하는 언어는 따로 없다. 그래서인지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의 영한사전들은 종교적 의미에서의 “vision”에 해당하는 번역어를 제공하고 있지 못하다. 사전에 뜻이 없으니 번역에 큰 문제가 생긴다. 그나마 가장 비슷한 용법을 찾는다면 “환상”이다. 그러나 환상이 “vision”의 번역어가 될 때 생기는 오해는 불을 보듯 뻔하다. 자유로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는 주체적인 어감으로 인해, 초월자와의 만남이라는 무거움과 수동성은 날아가 버린다. 게다가 “fantasy”와 구분되지 않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다. 중세 유럽 문학을 환상 문학이라고 부르는 웃지 못 할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많은 곳에서 환상이라는 번역어를 택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환상이라는 번역을 피하기 위해 이 단어를 그냥 “비전”이라고 옮기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까다로운 단어인데, 좋은 번역을 찾았다.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역사]를 번역하면서 최애리씨는 이 단어의 번역으로 환시(幻視)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아마 옛 천주교 단어들 중에서 찾아낸 듯한데, 참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낯설긴 하지만 터무니없는 혼동보다 낫다. 의미 자체가 우리말에 낯선 것이기에 낯선 단어로 독자의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용례가 전혀 없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적극 찬성하는 번역어이다.
이 노래의 "vision"은 종교적인 환상, 즉 환시이다. 꿈속에서 종교적 의미를 전달받는 여행과도 같은 체험을 한 것이다. 인터넷에 유통되는 이 노래 가사 번역에는 “내가 잠든 사이에 어떤 환영이 살며시 다가와 씨를 뿌리고 갔거든. 내 머리 속에 심어진 그 환영은 침묵의 소리 속에 아직도 남아 있어.”이라고 되어 있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환영은 더더욱 아니다. 무슨 귀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번역에 종교적 맥락이 보전되어야 하고, 그래서 나는 환시가 맞는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유행가 가사에 그런 이상한 단어를 써야 하냐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도 많은 곳에서 환상이라는 번역어를 택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환상이라는 번역을 피하기 위해 이 단어를 그냥 “비전”이라고 옮기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까다로운 단어인데, 좋은 번역을 찾았다. 자크 르 고프의 [연옥의 역사]를 번역하면서 최애리씨는 이 단어의 번역으로 환시(幻視)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아마 옛 천주교 단어들 중에서 찾아낸 듯한데, 참 좋은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낯설긴 하지만 터무니없는 혼동보다 낫다. 의미 자체가 우리말에 낯선 것이기에 낯선 단어로 독자의 주의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용례가 전혀 없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에서 적극 찬성하는 번역어이다.
이 노래의 "vision"은 종교적인 환상, 즉 환시이다. 꿈속에서 종교적 의미를 전달받는 여행과도 같은 체험을 한 것이다. 인터넷에 유통되는 이 노래 가사 번역에는 “내가 잠든 사이에 어떤 환영이 살며시 다가와 씨를 뿌리고 갔거든. 내 머리 속에 심어진 그 환영은 침묵의 소리 속에 아직도 남아 있어.”이라고 되어 있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환영은 더더욱 아니다. 무슨 귀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번역에 종교적 맥락이 보전되어야 하고, 그래서 나는 환시가 맞는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유행가 가사에 그런 이상한 단어를 써야 하냐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절부터는 죽 환시의 내용이다. 어느 거리를 걸어가고, 걸어가다가 일군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소통되지 않는 언어들로 독백하고 있다. 그들에게 소통의 방법을 알려주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 (노래의 전문은 http://blog.empas.com/blueruby/3640259 을 참고할 것.) 노래의 마지막 절은 그야말로 종교적인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And the people bowed and prayed
To the neon god they made
And the sign flashed out its warning
In the words that it was forming
And the sign said "The words of the prophets
Are written on the subway walls
And tenement halls
And whispered in the sound of silence"
사람들이 자신이 만든 네온 신에게 경배를 드린다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물질주의에의 경도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 때 네온 사인이 번득하더니 다음과 같은 경고 문구를 만들어낸다: “예언자의 말씀은 지하철 벽과 빈민가에 적혀 있다. 그 말씀은 침묵의 소리 속에서 나직이 울린다.” 화려함의 반대편에서, 도시의 누추한 현실 속에서, 그리고 고요 속에서 하느님을 말씀을 찾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이것이 사이몬과 가펑클이 1960년대 말에 노래한 신학이다. 아직도 유효한 메시지이기에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노랫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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