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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양생주>편에 나오는 소잡이 포정은 어찌 그렇게 칼을 상하지 않고 소의 고기를 잘 발라낼 수 있냐는 문혜군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처음에 소를 잡을 때는 눈에 보이는 것이란 모두 소뿐이었으나, 3년이 지나자 이미 소의 온 모습은 눈에 안 띄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있고 눈으로 보지는 않습죠. 눈의 작용이 멎으니 정신의 자연스런 작용만 남습니다. 천리를 따라 소 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 몸이 생긴 그대로를 따라갑니다. 기술의 미묘함은 아직 한 번도 살이나 뼈를 다친 일이 없습니다.
(안동림 역주, <<장자>>, 현암사, 93-4.)
뼈마디의 틈새를 발견하고 고스란히 그 틈새를 따라 칼을 움직이기만 하는 것, 그것이 양생(養生)의 도를 논할 수 있는 경지이다. 경지라는 말을 쓸 때 이 이 이야기가 떠오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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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에는 밤기온이 따스하니 기분이 좋았다. 룰루랄라하고 집에 와서 텔레비전 뉴스를 보니 내용이 요즘 ‘좀’ 덥다는 이야기였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는데 기온이 여전히 38도(미국온도 100도)라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호젓하게 걸어온 밤길이 38도였다고? 요즘은 해뜨기 전 새벽이 되어야 30도 정도 되고, 낮 최고 기온은 43도(미국온도 110도) 정도이다. 원래 애리조나의 8월 말 최고 기록은 미국온도 113도까지 올라가는 건데, 지금은 110도를 약간 웃도니 기록 갱신에는 못 미치고 있다. (지금 온도를 보이기 위해 전의 글에도 사용한 적 있는 온도계를 갖다 붙인다. 미국온도인데, 대략 86=30도, 95=35도, 100=38도, 110=43도, 이렇게 된다.)
낮에 걸어다니는 것이 이상하게도 괜찮다. 43도의 땡볕을 걷고 있는데도, 따땃하니 좋다는 기분을 느끼고, 가다가 그늘만 들어가도 이내 시원해짐을 느낀다. 처음엔 내가 하도 땡볕을 받다보니 머리가 좀 이상해진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이 곳에서 쾌적하게 지내는 경지에 이르렀음이 차차 분명해진다.
이년 전 이 곳에 와서 돌아다닐 때만 해도 애리조나의 실외는 온통 불덩어리(inferno)라고 느껴질 뿐이었다. 사우나에 들어갔다 냉탕으로 뛰어드는 아이처럼, 나는 잠시 바깥에 나갔다가는 이내 에어컨이 있는 실내로 뛰어들어오곤 했다. 그늘이고 뭐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와 미칠듯이 덥기만 했다. 하지만 올해는 밖에 있는 것이 있을만하다. 가다가 그늘이 있으면 들어가 숨도 돌리고, 불어오는 바람도 상쾌하게 맞아들이고, 귀에는 엠피쓰리 플레이어를 꽂고 정태춘의 “애고, 도솔천아”를 들으며 걸어간다. 작년만 해도 상상 못했던 일이다.
학교 중앙을 관통하는 길은 오렌지 몰(Orange mall)이다. 몰(mall)이라는 단어는 나무그늘이 있는 산책길이라는 뜻이다. 옛날엔 이 단어가 터무니 없다고 생각했다. 나무가 우거진 길도 아니고, 나무 몇 그루 길 주변에 안쓰럽게 버티고 있는 땡볕길이 산책길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길 주변의 돌 벤치들은 항상 돼지고기 굽는 석판처럼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올해 들어서야 그 길은 정답게 느껴진다. 존재 가치가 의심스러웠던 분수도 시원하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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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학기다 보니 새로온 한국 학생들이 눈에 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새로 온 이들은 단번에 눈에 띈다. 일단 선글라스를 쓴 차림새. 물론 여기서 선글라스를 쓰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한국 사람들이 쓴 선글라스는 달리 보인다. 생활인의 선글라스라기 보다는 행락객의 선글라스이다. 이건 어쩔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생활인의 선글라스라는 개념은 그리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하거나, 멋부리거나, 피서나 여행갈 때 쓰는 거지, 등하교시에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제품의 차이가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까맣고 크고 동그란 선글라스를 끼고 어쩐지 피서지나 여행지 복장의 느낌을 주는 한국 신입생의 모습에서는 아직 이 곳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전해진다. 무엇보다도 상상해본 적도 없는 비현실적인 더위에 당황해하는 표정을 숨길 수 없다. 빨리 이 땡볕을 벗어나야 겠다는 한국 학생들의 얼굴에서는 여유를 찾을 수 없다. 여유라는 게 마음먹는다고 생기는 게 아니지. 몇 개월 지나고, 이 곳 환경이 몸의 회로 안에 입력이 될 때, 그 때야 여유있는 얼굴들을 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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