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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 종교를 바라보는 네 시선

by 방가房家 2023. 5. 6.
A. Leo Oppenheim, Ancient Mesopotamia: Portrait of Dead Civiliza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7[1964]), 171-227.
 
 
메소포타미아 ‘종교’가 서술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인식 속에 존재하는 서구적인 종교 개념을 통한 그 시대 종교 서술이 가능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오펜하임은 서구적 종교 개념에 영향 받은 서술을 피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자료를 통하여 그들의 생활과 종교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보이고자 한다.
 
메소포타미아 종교가 서술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
메소포타미아 종교에 대한 총괄적인 서술(신학부터 시작되는 크레이머의 서술의 경우)이 되었든 종교사의 서술(야콥슨의 경우)이 되었든, 그것이 자료로부터 구성된 서술이 아니라면 종교에 대한 연구자의 전제를 자료에 덮어씌우는 식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오펜하임은 우리가 갖고 있는 자료들은 맥락이 제거된 것들이라서 그러한 서술에 불충분하다는 점을 잘 설명해준다. 고고학 자료들, 특히 종교 건물과 도상들(부조, 인장, 접시)에 남아있는 종교 이미지들은 당시 종교 생활에 대하여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것은 종교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들이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상황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 자체로만으로는 이야기를 구성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헌 자료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들도 중요하다. 의례에 사용되었던 기도문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들은 반복적으로 사용된 의례적 표현들 담고 있지 실질적인 내용은 별로 갖고 있지 못하다. 신화들은 고도로 문학화된 자료로, 수메르 궁정이나 바빌로니아 서기관들이 발달시킨 문학 양식을 보여줄지는 몰라도 실제 종교와는 거리가 있는 자료들이다. 마지막으로 의례에 관련된 문헌들이 있는데, 우리는 이 자료들은 통해 단일한 경향성을 섣불리 추론하기 보다는 메소포타미아 종교가 얼마나 복합적이며 중층적인 신앙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 게 된다. 저자는 검은 소가죽을 씌운 구리북을 예로 든다. 고대 바빌로니아 말기까지 소급되는 전통을 가진 이 제기(祭器)는, 후대 전통(셀루시드 시대의 우룩 문헌)에서는 소를 죽여서 북가죽을 얻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묘사되는 반면에, 그보다 6-8백년 앞선 아수르 문헌에서는 소의 죽음이 신의 살해에 대한 애도로 이어지는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두 다른 의례에 대해 어떤 상관성을 논할 수 없다. 다만 의례‘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오펜하임은 종교 서술이 가능하지 않은 이유로 중요한 점을 지적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종교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남아있는 도상, 제기, 문헌들은 모두 왕의 종교 행위에 관한 것들이고, 사제들의 종교에 대해 짐작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그러나 왕과 사제의 공식 종교 말고,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대중적 종교에 대해서는 거의 알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공식 종교와 대중적 종교가 연속선상에 있다고 가정하고 유추를 통해서 전체를 그려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음식 공양:
오펜하임은 실제 생활에서 종교가 어떻게 기능하였는가를 정밀하게 추적한다. 그는 종교 도상의 역할에 주목한다. 도상의 쓰임이 현재 서구 종교에서 이미지가 사용되는 방식과는 전혀 달랐음에 주의해야 한다. 신의 형상은 신전 내에 신 그 자체로서 모셔졌다. 구체적으로 매일 신을 모시는 의례를 통해, 그리고 신을 모시고 바깥 행차를 하는 의례를 통해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상이 다루어진 방식을 살필 수 있다. 신전에서 신을 먹이고 씻겨 매일매일을 살아가게 하는 것, 그것은 왕실 종교 생활의 중심이었다. 신을 모시는 행동들은 실제 왕의 일상이 반영된 것이었다. 그리고 왕처럼, 신의 조상은 궁전 안쪽에 있으면서 벽으로 차단되어서 일반인들의 시선이 닿지 못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셀루시드 시기 문헌에 따르면, 우룩 신전에서 신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하루에 두 번, 아침에 신전을 열 때와 저녁에 문닫기 전이었다. 점심 공양에 대한 기록은 하나 있을 뿐이다. 신의 식사 메뉴와 횟수는 당시 왕실 식생활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식탁을 들이고, 손씻을 물이 담긴 접시를 내오고, 음료가 나오고, 고기가 메인으로 나오고, 마지막으로 과일이 예쁘게 담겨 나오는 것은 왕이 했던 식생활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이 (눈을 통해) 식사하고 남은 음식은 축복 받은 음식으로 왕이 먹게 된다. 사제들도 남은 것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에 식사대접을 하는 것은 상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최상의 음식들을 요리해서 올리고 왕이 식사하는 실제적인 행위였고, 이 의례와 관련된 유통과정이 실물 경제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왕에게 음식을 먹이는 메소포타미아 의례를 묘사함에 있어서, 서양의 희생(sacrifice)에 관련된 용어보다는 동아시아의 제사(祭祀) 관련 용어들을 통해 더 적합하게 번역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펜하임의 지적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의 음식 공양은, 제물을 태워서 연기로 만들어 신이 존재하는 다른 차원으로 보내어 흠향(歆饗)하도록 하는 구약 전통의 번제(燔祭)와는 다른 것으로 실제 음식을 먹이고 신이 먹고 남았다고 생각된 음식을 사람들이 음복(飮福)하는 제사의 구조를 지닌다. 이에 덧붙여 오펜하임은, 음복(communio)의 대상이 왕과 사제들에 국한 되었지 일반 서민에게는 미치지 않았음도 지적한다. 여전히 ‘그들만의’ 종교라는 것.
 
메소포타미아 심성론:
오펜하임은 기도 문헌에 등장하는 어구 분석을 통해서 메소포타미아의 영(靈) 개념을 분석한다. 이 체계는 서양의 것과는 다르다. 누군가가 ‘영(ilu, istaru, lamassu, s--edu)을 지닌다’는 것은 행운을 지님을 의미한다. 운, 운명의 관념과 영, 영혼의 관념이 상관성을 지닌다. 심투(símtu)라는 단어는 ‘운명’이나 ‘운’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사실 신이나 왕과 같은 존재에 의해서 부여받은 행위의 경향성을 뜻한다. 이것은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특권이나 힘을 부여하는 속성으로, 한 개인이 삶에서 부여받은 몫을 뜻한다. 그리스에서 ‘아프로디테의 모이라(moira)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했을 때의 모이라의 의미이다. 한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그림자 속에서 따라다니는 영이 있다고 상상되는데, 이 영이 갖고 따라다니는 것이 심투이다. 이처럼 메소포타미아의 영 개념은 한 개인의 일생 이야기에 따라다닌다. 다시 말해 심성론과 운명론이 결합된 양상.
 
점치는 방법:
메소포타미아에는 점에 관련된 많은 문헌들이 남아있다. 자연 현상, 사회 현상의 인과 관계에 대한 관찰이 방대한 오멘(omen) 문헌으로 집적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인식의 발달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과학(특히 천문학이나 기상학)의 전단계로 논의될 부분도 없지 않으나, 여기서 저자는 신과 인간의 소통 방법으로서의 점술에 중점을 두고 그 방법들을 논의하고 있다. ①인위적으로 점괘를 만드는 테크닉이 있다. 산가지를 던지는 설시(揲蓍) 작괘법이 있는가 하면, 물 위의 기름의 모양을 관찰하는 것(lecanomancy), 향 연기의 모양을 보는 것(libanomancy) 등이 있다. ②신이 보여주는 징조를 해석하는 방법이 있다. 새의 지저귐, 행동 등을 관찰하는 조점(鳥占)이 아시리아에서 발달하였다. 동물 간의 모양에서 읽어들이는 방법(hepatpscopy, extispicy)이 발달하여 간 모양이 제작되었다.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에서 일어난 이변을 기록하는 오멘 문헌이 제작되어 여러 국가에서 재생산되었다.


점술은 신과 인간의 상호소통의 기술이었다. 예-아니오를 묻는 스무고개식 소통법이 있었는가 하면, 징조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해독하는 방법도 있었다. (비슷한 재료를 사용함에도 ‘hepatpscopy’가 전자의 소통법이라면, ‘extispicy’는 후자의 소통법을 사용한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점술에서 일방향적인 의미 전달이 아니라 상호 대화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점치는 법을 발달시켜 나갔다.
 
 
“메소포타미아 종교는 써지지 말아야 한다.”는 오펜하임의 주장은 오해받기 쉽다. 사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종교에 대한 여러 측면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럼에도 서술할 수 없다고 했을 때의 그 ‘종교’는 서구적 개념에 입각한 서술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컨대 야콥슨이나 크레이머의 종교 서술은 그러한 점에서 비판받아야 할 측면이 있다. 서구적 전제를 위에서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종교’라고 생각되는 내용을 찾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생활과 관련되는 부분에서부터, 다시 말해 그들의 삶으로부터 길어 올려지는 식의 종교에 대한 서술을 오펜하임은 의도하고 있으며, 이 글의 세 항목에서 그러한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Thorkild Jacobsen, Toward the Image of Tammuz and Other Essays on Mesopotamian History and Culture (Massachusett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0), 1-38.
Samuel Noah Kramer, The Sumerians: Their History, Culture, and Characte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3), 112-164.
Jean Bottéro, Mesopotamia: Writing, Reasoning, and the Gods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201-286.
 
크레이머는 “수메르 신들은 전적으로 신인동형적이다. 가장 강력하고 전지한 신도 인간의 꼴을 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117)고 단언한다. 반면에 야콥슨은 메소포타미아 신들은 원래 자동사적인 속성을 갖고 있었는데 후대의 사회정치적 환경에 의해서 신인동형적인 속성으로 변화해간다는 역사적인 서술을 한다. 메소포타미아 종교의 특성에 대해 이렇게 다른 견해를 보이는 것은 이들이 다른 자료를 놓고서 서술하였기 때문은 아니다. 차이는 종교 모델을 어떻게 전제하였느냐에서 생긴다.
 
크레이머의 글은 일반 독자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점을 감안하다고 해도, 다시 말해 기독교권 독자들을 염두에 둔 서술임은 이해할 수 있지만, 메소포타미아 종교 이해가 기독교와의 관련성 아래서 주로 서술되었다는 데서 오는 한계는 치명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이른바 ‘신학’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는 다양한 출처의 메소포타미아 신화들을 한데 모아 기독교 신학 체계와 비슷한 틀로 천지창조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작업을 위해 가상 인물인 ‘우리의 수메르 사상가’(혹은 신학자)를 등장시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것은, ‘원시 종교’를 주지주의적인 방법으로 설명하기 위해 ‘원시 철학자’를 등장시켰던 에드워드 타일러의 작업을 연상시킨다. 타일러의 경우만큼이나, 크레이머의 이 방법은 작위적이고 현대인 위주의 방법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소거될 수밖에 없다.
그는 성서 대목들과의 유사점 혹은 비교 거리를 던져주며 글을 진행하는 데, 이 중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엔키 이야기로부터 이브 창조 때 갈비뼈와 연관된 언어유희와의 관련성을 지적한 부분(148-149)이 한 예이다. 그러나 서술의 체계성은 극단적으로 떨어져서, 그가 마치 여행객처럼 두 전통 간의 인상기적인 유사성을 보이는 데 그치지 않는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이 허술함은 이것이 일반 독자를 위한 글이라는 사실로 묵과될 성질의 것인가? 그것은 그의 학문하기 방법과는 관련이 없는가?
 
확인해 보아야겠지만, 초기 메소포타미아 신격은 자동사적인 성질을 가졌다가 후대에 신인동형적으로 변화한다는 입장은 야콥슨의 글에서만 보이는 것 같다.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그는 후대의 자료에서 초기의 모습을 구성하고 적극적으로 그 특성을 이야기한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바에 의하면, 가장 오래된 메소포타미아 문헌 자료는 기원전 2천년 경의 것인데, 야콥슨은 이러한 문헌들(그리고 그 후의 문헌들까지)로부터 그 이전 시기의 특성을 규명하고 있다. 나아가 이 자료들로부터 도출된 자동사적 특성을 메소포타미아 종교의 고유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종교사의 일반적인 발달 과정에서 유추하여 그러한 자동사성에서 타동사성으로의 발전을 주장하였다면, 썩 만족스럽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해할만한 설명이 되었을 텐데, 고유한 특성으로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대담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초기의 자동사성을 이야기하는 자료 중에는 신들을 나타내는 문장(紋章, emblem)들, 예를 들어 두무지의 문장이 보리라는 물질적 형태 자체로 나타난다는 것인데, 이러한 자료 사용에는 오펜하임이 지적한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도상들만 있는 상태에서 그 도상이 사용된 종교 경험을 유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말이다.
야콥슨의 모험적인 자료 구성에 적극적으로 찬성하기 힘든 다른 이유는, 그가 ‘반응으로서의 종교’, 즉 누미노제 경험으로서의 종교라는 기독교식의 수동적인 종교 모델을 처음부터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이는, 오펜하임이 지적한, 서구 전통의 전제를 통해서 비서구 전통을 구성하는 일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이런 모델 선택이 자료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보테로의 논의가 앞의 두 학자보다 세련된 느낌을 주는 것은, 그의 글이 앞 두 글에 비해 2-30년 이후인 최근의 글인 것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종교 개념의 정치적 측면에 대한 언급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최근의 논의들을 숙지하고 접근의 세련성을 보인다. 그는 개인의 반응의 차원에서 종교를 이야기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하는데, 이것은 좀더 성숙한 차원에서 야콥슨의 입장을 따르는 것이다. 그는 사랑이라는 괜찮은 비유를 통해 종교를 이야기한다. 사랑에서 우리가 솟아오르는 감정, 그 감정에 의해 맺히는 이미지, 그에 따른 행동을 이야기할 수 있듯이, 종교에서 종교 감정(religious sentiment), 이미지들과 생각들의 연합인 종교 관념(religious ideology), 그리고 종교 행위의 세 차원에서 메소포타미아 종교를 이야기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자료들을 통해 종교를 서술하는 작업에 대해 말하면서, 보테로는 오펜하임에 대한 중요한 반론을 펼친다. 자료들이 밝혀주는 것이 주로 왕과 사제들의 종교에 관한 것이라 해서, 그것이 그 나머지 사회 집단의 종교에 대해 말해주지 못한다는 가설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오펜하임이 왕가의 공식 종교와 대중 종교 간의 불연속성을 강조하고 따라서 서술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한 데 반해, 보테로는 메소포타미아 사회 내의 종교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오펜하임이 사원 내 신의 성상과 관련된 제의들이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장소에 자리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보테로는 성소는 공적인 장소이며 그것에 공명하는 공공의 종교적 심성이 자료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또한 흔히 신중심적인 언명으로 구성되는 메소포타미아의 개인 이름을 통해서, “종교 감정, 종교 관념, 그리고 종교 행위가 중심부(majores)로부터 주변부(minors)에 이르기까지 본질적으로는 달라지지 않는다”(208)는 확신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즉, 메소포타미아에 공통된 종교에 대한 서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장(章) 말미에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체계”를 서술할 수 있다는 확신은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천상으로부터 지옥에 이르기까지, 세계 창조 이래로, 왕실 체제에 대한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유비는 계속 융성하였고 보편적으로 나타났다.”(231) 과연 메소포타미아 종교가 체계라고 불릴만한 정합성을 지닌 문화적 현상이었는지에 대해서, 보테로의 확신을 따를 것인지 오펜하임의 비관을 따를 것인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주의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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