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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발제

유골/사리(relic)

by 방가房家 2023. 5. 3.
“유골/사리”(relic)
 
Gregory Schopen, Critical Terms for Religious Studies 14장
 
영어 "relic"은 라틴어 "relinquere"(남기다)에서 유래한다. 유골은 ‘뒤에 남은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사리(舍利)의 산스크리트 어원은 몸이라는 의미의 "saria"(복수형 "sariani"가 사리를 의미함), 혹은 구성 요소, 근본 물질이라는 의미의 "dhatu"이다. 어원에서 동서양의 죽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나지만, 유골/사리에 대해서 말해진 것과 사람들이 행한 것은 비슷하다.
 
종교개혁자들은 유골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칼뱅의 글("An Admonition Showing the Advantages Which Christendom Might Derive from An Inventory of Relics" http://www.societaschristiana.com/History/Reformation/InventoryOfRelics.html)에는 유골에 대한 독설들이 난무한다. ‘미신’, ‘타락한 수행’, ‘거칠고 무식한 남자들과 아줌마들의 과도한 열정’, ‘무식한 사람들’, ‘불쌍한 인간들’, ‘사기꾼 사제들과 수사들’ 등. 유골 숭배는 천한 것들의 믿음이라는 신학적 태도는 개신교뿐만 아니라 서구 지성계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종교 윤리 사전>>(ERE)의 "relic" 항목에는 ‘신앙의 불합리성’, ‘사람들의 경솔한 믿음’, ‘미신’ 등의 표현이 등장하며 이를 사기라고 결론내린다. "relic"의 동방편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인도 불교 전통에서는 사리에 대한 경멸적인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서양의 유물 숭배를 기술할 때처럼 신학자들의 저서를 인용할 수는 없었지만, 사전 저자는 대신에 유럽 외부인들의 불교에 대한 관찰을 인용해서 극단적이고 미신적인 숭배라고 기술한다. 이러한 서술에 담긴 논리적 설명은 유물 숭배가 자연적인 애착이나 본능적인 경배의 결과라는 것이다. 여기에 ‘필요’라는 전가의 보도같은 설명이 붙는다. 재확인의 필요, 성스럽다고 생각되는 것과의 물질적 접촉의 필요 등의 다양한 필요에 의해 사람들이 이런 식의 바보같은 짓도 한다는 것.
 
신자들이 유골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믿거나 말거나, 유골은 숨을 쉰다!
그레고리우스 투르 저술에 이런 대목이 있다. 성 베드로의 무덤에 천조각을 드리우고 기도를 드리면 천이 신령한 힘을 머금어 무거워진다고 한다. (이런 집요한 경험주의는 최근 죽을 때의 무게 변화를 측정해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이라고 주장한 의사 이야기에서도 지속된다.) 기원전 2세기경 인도의 비문에선 사리를 “숨을 쉬는 석가모니의 몸”이라고 지칭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사에서 탑이나 부도의 파괴는 ‘살인’이라고 생각되었다.
유골은 물질적 존재보다는 그것의 위치와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행위에 의해서 규정된다. 유럽에서 성 암부로시우스는 이전에는 격리되었던 성인 유골을 처음으로 성안 교회에 들이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고, 그 이후에는 유골 주변에 묻히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에 따라 교회 마당에 무덤이 생기고 그래서 후기 고대 사회에선 산자와 죽은자의 영역 구분이 무너졌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질 해리스는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는데, 교부들이 유골을 산자의 세계로 옮긴 것은 경계를 부수려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의 유골이 죽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살아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대반열반경>>에서 열반 후 석가의 유골을 어떻게 이동할 지 논란이 있다가 결국은 신들의 뜻을 좇아, “북쪽 길을 지나 마을 북쪽으로 운반하여 북문(北門)에서 마을로 들어가 마을 중앙까지 갔다. 이렇게 마을 중앙까지 가서 그들은 그곳에서 왼쪽으로 돌아 동문(東門)에서 마을 밖으로 나와 마을 동쪽 외곽에 있는 마쿠타 반다나라는 말라 족의 영지로 가, 그곳에서 세존의 유해를 안치했다.”(http://blog.empas.com/mangsang1515/read.html?a=13918620)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에 엿보이는 생각은 석가의 유해가 죽은 것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독교와 불교 양 전통에서 유골에는 미덕, 은총, 은혜,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되었고, 이것들은 만지거나 혹은 더 간접적인 접촉에 의해 전이된다고 생각되었다. 불교 수도 계율에 따르면, 승려는 탑의 그림자를 밟아서는 안 된다. 마당 쓸 때 탑 그림자를 건드리거나 흙을 튀기면 불길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성인 곁에 묻힘(burial ad santos)은 대중 현상이었고 교회 권력에 의해 널리 승인된 관행(praxis)이었다. 그럼에도 엘리트들은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짧은 글(“On the Care of the Dead” http://www.newadvent.org/fathers/1316.htm)이 예외이긴 한데, 이 글에서 나타나는 정서는 망설임과 말하기 곤란함이다. 종교 엘리트들은 전통에 대해 글을 썼지만, 자기들과 신자들이 한 것에 대해서는 글을 쓰지 않는다. 이것이 연구자들이 직면하는 문제이다. 그들이 실제로 한 일을 밝히기 위해서는 고고학 자료의 도움을 받는 일이 필요한데, 기독교 역사 서술에서 고고학 자료가 수용되는 속도는 더럽게 늦다. 1970,80년대에 이르러서야 시작되고 있지 그 전에는 신학 문헌만 엮은 것이 역사로 판을 쳤다. 불교 연구의 경우엔 더 심하다. 이러한 지체엔 개신교의 영향이 있다. 사람들이 행한 것은 학자들이 정의하는 ‘진정한’ 종교에 주변적인 것으로 생각되었기에 오랫동안 자료에서 배제된 것이다.
 
공식적 교리에 나타난 것으로만 보면 불교와 기독교의 유골 이해는 상당히 다르지만, 고고학적 자료에서 나타나는 실천의 양상을 보면 유사한 점이 많이 나타난다: 유골, 탑, 사리는 중심에, 초점에 봉안된다. 이것들은 성스러운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살아있는 그 분은 유골에 현존하십니다.”라는 언급이나 “사리가 존재할 때 부처가 계십니다.”는 말이 이를 말한다. 이 중심은 문화적으로 살아있으며, 이동하지 않는다. 그 생명력은 접촉, 근접, 그림자에 의해 전이된다. 그 영역 가까이 시체 안치소가 자리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학자들은 아직도 믿음과 형식상의 교리를 구분할 줄 모르는 이가 많다. 형식상의 논리말고 실상을 보아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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