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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배움/메모

유교라는 문화의 덩어리

by 방가房家 2023. 4. 30.

한 전통이나 한 민족이나 한 국가를 어떤 판에 박힌 관념(stereo type)으로 통으로 묶어 매도하는 버릇,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종교 전통을 공부하면서 배우는 가장 큰 수확의 하나이다. 유교를 둘러싼 논쟁들은 따지고 보면 대부분 우리의 고정관념의 산물이다. 이 책은 그러한 우리의 관념들에 대해 설득력 있는 자료를 통해 반론을 펼친다. 

우리가 유교라고 통칭하는 문화의 덩어리 속에는, 비록 철학, 역사, 문학, 정치, 경제 등의 영역으로 세분화되지는 않았지만, 지구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2천 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일구어온 삶의 흔적이 녹아들어 있다. 그 안에는 권위주의적인 교리의 일면도 있지만 부당한 권위에 대항하는 비판적 지성의 목소리도 담겨 있으며, 인간을 도덕적 질서 안으로 구속하려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모습도 있지만 인간다운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진지한 성찰도 담겨 있다. 그리고 자유나 평등과는 거리가 먼 권위주의적 내용도 들어 있지만 천민자유주의와 중우민주주의를 극복하는 데 시금석이 될 만한 양약도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의 활성화에 별 도움이 안 되는 비자본주의적 요소도 담겨 있지만,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추악상과 야만성을 극복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지혜도 담겨 있다. 이렇게 다양한 함의를 지닌, 그리고 때로는 상충된 모습을 지닌 문화의 덩어리를 단순하게 일관 폐기 또는 일괄 옹호로 낙착지으려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문화적 전통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리고 전통의 어떤 부분을 선별해서, 산포하고, 써먹으려 하는가가 문제이지, 일괄 폐지론을 외치거나 부흥론을 외치는 일은 호사가들의 무의미한 입씨름으로 보인다.
이승환, <<유교 담론의 지형학>>(푸른숲, 20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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