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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만남

첩을 버려야 함

by 방가房家 2023. 4. 20.

복수(複數) 결혼의 사회 분위기에서 살아오던 개종자들은 유럽식 핵가족을 따라가기 위해 한 명이나 그 이상의 부인이나 남편을 버리도록 요구받았다. 오랫동안 표준이었던 결혼 제도 내에 살아가다가 갑자기 결혼 관계로부터 배제되어버리고 살아갈 방도도 막막했던 수많은 여성들과 그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를 물어본 역사가들은 거의 없었다.
(George E. Tinker, Missionary Conquest, p.26.)

북미 인디언 선교 초기의 상황이다. 상황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나라 기독교 선교 초기에 겹쳐지는 장면이 있다.
1895년 감리교회에서는 첩을 둔 교인을 제명시키며, '남녀를 막론하고 복혼 관계자는 감리교회에 입교하거나 재적할 수 없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장로교회에서도 1896년 이 문제를 놓고 논의를 거듭했다. 첩을 둔 사람의 교인 자격을 놓고 선교사들은 성경을 찾아보기도 하고, 중국•일본•인도 등의 선교사들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다른 나라의 선교사들은 대체로 축첩을 허용하는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찬반 양론이 팽팽히 맞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에야 축첩을 금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즉 축첩은 절대 허용하지 않으며, 일부일처(一夫一妻)가 확인될 때까지 제명시킨다는 것이다. 이로써 첩을 둔 남성은 교인이 될 길이 막히게 되었다. 이 원칙이 전국에서 예외없이 그대로 지켜졌을까 하는 점은 의문으로 남지만, 어떻든 원칙은 그러했다.
교회의 이런 조치는 본처(本妻)인 여성 교인들이야 두 팔을 들고 환영할 일이었지만, 남성 교인들은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그저 당연시했고, 한두 명의 첩쯤은 두어야 체면이 선다고 생각했던 남성들에게 이것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
그러나 교회는 이 문제를 놓고 타협하지 않았다. 첩을 버리든 교회를 떠나든 양자택일의 길밖에 없었다. 이것은 교회로서도 어려운 결단이었다. 아직 교회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초기 상황에서 한 명의 교인이 아쉬운 판국에, 있는 교인마저 내보내야 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한규무, “초기 한국 장로교회의 결혼 문제 인식(1890~1940)” )
위의 서술의 관점은 좀 마음에 안 든다. 당사자의 현실적 어려움에 대한 고려라기보다는 교회 당국의 관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양반 교인이 떨어져 나갈 수 있는 “불리함”을 무릅쓰고 타횹하지 않는 결단력을 보였다는 평가인데, 당사자의 삶의 파열음에 대한 관심은 결여되어 있다. 축첩을 지지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축첩이 용인된 사회에서 이미 형성된 삶이 있다. 그 삶을, 그 존재 자체를 ‘없는 것’으로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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