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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선교사문헌

게일의 한국종교 서술(1909) 1

by 방가房家 2010. 5. 13.
제임스 게일의 1909년 책에서 한국종교를 서술한 것은 3장이다. 일부분을 발췌하여 번역하였다.
James Scarth Gale, <<Korea in Transition>> (New York: Young people's missionary movement of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1909).

(67-70)
한국은 유난히 종교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도성에는 평민들 거주지 위에 솟은 거대한 사원이 없다. 승려, 공적인 기도, 참배객, 탁발승, 돌아다니는 성스러운 동물, 예식서나 촛불의 판매, 향을 올릴만한 그림, 부복仆伏하는 모습 등, 사실상 종교를 나타내는 일반적인 표식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영혼이 자신을 벗어나 그 위나 너머에 있는 다른 영혼들에 도달하는 것을 종교라고 본다면, 한국인 역시 종교적이다. 한국인은 성스러운 책들을 갖고 있고, 기도할 때 무릎을 꿇으며, 하느님, 영, 하늘나라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우리는 한국인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들을 거듭해서 듣게 된다. “하느님은 올바른 일은 한 사람에게 축복을 내려주신다. 그릇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불행으로 벌주신다.” “하느님께 복종하면 살 것이요, 복종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사람들끼리 비밀로 말하는 것을 하느님은 천둥이 치는 것처럼 들으신다. 어두운 방에서 세운 음모를 번갯불처럼 보신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한국의 종교는 조상 숭배가 불교, 도교, 귀신 숭배(spirit cult), 점복, 주술, 풍수, 점성술, 주물숭배와 뒤섞인 이상한 종교이다. 용龍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귀신devil이나 자연신들은 도처에 있다. 도깨비(elf, imps, goblins)들도 많이 있어 온갖 장난질을 한다. 망자의 정령은 여기저기 나타난다. 망령들은 주변을 활보한다. 산, 나무, 강, 질병 안에는 인격화된 존재들이 지하에도 공중에도 존재한다. 어떤 존재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요구를 관장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성격상 악해서 사람들에게 슬픔과 공포를 안겨준다. 성격 자체가 쉽게 삐지고 변덕 심하고 달래기가 힘들어서, 정령들의 세계는 하데스 세계를 내보내서 인간들을 마음대로 다스리게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여호수아 시절에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보여주었듯이 말벌에 맞서 싸우는 것은 어렵다.[<여호수아기> 24장 12절] 차라리 말벌은 정통으로 맞출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서 누가 머리도 없이 튀어나오거나 다른 몸뚱이를 달고 있는 귀신, 유령, 도깨비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비숍 부인이나 퍼시벌 로웰이 이끈 논의대로, 이런 종류의 것들 말고 나라나 민족 전체의 마음을 사로잡은 종교가 존재하는가? 한국 환경에 더 오랫동안 친숙해질수록, 나는 한국인들이 종교를 갖고 있으며, 본국의 일반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위해 실천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종교를 위해, 또 종교를 갖고 있기 때문에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모든 숭배와 관습 위에 존재하는 것은 조상숭배이다. 이것이야말로 번영과 성공이 넘치는 행복한 나라로 가는 한국의 문을 이루는 주춧돌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삶과 희망으로 가는 대로를 막는 것이다. 한 명의 온전한 조상 숭배자가 부처님을 참배하고 옥황상제에게 의뢰하고 흔히 볼 수 있는 서낭당 앞에서 절하고 침을 뱉고 오방장신을 위한 기둥[장승]을 세우고 점을 치거나 운을 비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조상을 망각하고 이러한 존재들에만 의탁하는 것은 알맹이 없은 허깨비에 기도하는 일이 될 것이다. 조상숭배는 한국인의 마음과 정신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다.
조상숭배를 알려줄만한 사원, 재단, 성소, 사제, 주문이 없는데, 조상숭배가 어떻게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일까? 무엇이 조상숭배를 나타내는 특징일까? 바로 상복喪服, 신주神主, 신주단지, 무덤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것들과 이에 관련된 사상들이 한국인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고, 이것은 기독교 교의가 서양에서 차지한 자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기에, 이들에 대해서 상세하고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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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9)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국인은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분은 하나님(Hananim), 위대한 한 분이다. 그분의 이름은 한문으로나 한국어로나 ‘하나’면서 ‘위대하다’는 의미의 용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늘에서나 지상에서나 지하에서나 그분의 닮은꼴이나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 절대 통치자이다. 위대함은 그분의 것이다. 사랑, 빛, 삶과 기쁨은 그분과 연결되지 않는다. 문지방의 먼지를 털고 있는 (비기독교인) 할머니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오늘 비가 오겠네요.” 할머니의 대답은 이랬다. “비? 그걸 누가 알아?” “하지만 조간신문에서 날씨가 그럴 확률이 높다고 하던데요.” “조간신문? 참나,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해 조간신문이 뭘 안다고?”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읽으면 한국인들은 바로 답한다. “태초에 누군가가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 “누가 매일 악한 자들에게 진노하는가?” “하나님.”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땅은 그 분이 만드신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이 소외되고 상실한 자들과 더불어 이 땅의 배고픔, 삶, 고통, 죽어감 위로 내려오신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동양인에게는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이야기, 그러나 그들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고 받아들이게 잡아줄 이야기이다.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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