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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자료/만남

만남 이야기들

by 방가房家 2009. 2. 3.
<<대전·충남지역 교회사 연구>>에는 한국인들과 기독교의 만남의 양상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들이 떼거지로 나온다. 이런 자료들을 찾아다니는 나로서는 감사할 노릇. 다만 이 책에서 견지하고 있는 신학적 관점에는 이론이 있다. 전통의 상징체계와 기독교 상징체계의 상호교섭을 일종의 난맥상으로 보고 이런 것을 고쳐 “기독교 정통”을 잘 배워야 한다는 일종의 계몽적인 태도가 은연중 드러난다. 관점의 차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내 입장에서 볼 때는 좀 아쉽다. 새로운 이론적 성찰의 조명을 받고, 기독교사를 서술하는 새로운 언어를 구성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좋은 자료들이기 때문이다. 하긴 내가 매달리고 있는 게 그런 작업인데, 나 역시 아직 그럴듯한 언어를 제공하지 못하는 마당에 남 작업에 아쉽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할 처지는 못된다. 이제 다 시작인 것을.

기도라는 행위. 분명 전통적인 신앙행위의 연속선상에 있다.
1916년 60세 난 할아버지가 성결교의 흥산전도관에 나타나 폐질에 걸린 며느리의 치료를 요청해 왔을 때, 사역자들은 그 할아버지에게 하늘에 기도할 것을 주문했다. 당시 그는 기독교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올렸고 결국 그의 며느리는 완쾌되었다.

병고침이라는 역할 계승. 기독교는 그 자리에 들어왔던 것.
1923년 은산에서 4마일 떨어진 곳에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발병 초기에 박수를 불렀지만 아들의 상태는 차도가 없었다. 그때 만난 은산의 한 교인은 그녀에게 예수를 믿으다면 아들의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개종을 권유하였다.

절에 가는 길과 교회가는 길, 역시 연속선상에 있다.
1919년 감리교 논산 구역 성리교회의 배세라 부인은 "십유여 년 전에 계룡사 신원사로 불공하러 가는 길에 전도인 신현구씨의 전도를 듣고 그때부터 깨닫고 주를 믿고 경천교회에 가서 예배보고 왔는데 그 후로부터 산에 가서 기도하기를 작정하고 오늘날까지 풍우한서를 불구하고 열심 기도할 결과 그 교회가 신령하게 되었다.

신령님이 점지해 준 예배당.
여인은 수일 후에 와서 자가의 모든 불상을 타파하고 예배보아 달라고 간청함으로 반가이 허락하였드니 여인은 숙소로 돌아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다시 와서 기도하고 떠났다... 예배가 끝나자 여인은 정신이 상쾌하고 희열이 충만하여 말하기를 전에 자기의 접한 신이 이르기를 이곳에다 당을 지을 것이라 하더니 마귀도 이곳이 예배당 될 줄을 안 것이라 하며 선생들이 다녀가신 표적을 붙이고 가라고 한다. 마침 벽상에는 유리간판에다 용화산 석굴암 至誠發願 所願成就라고 써있다. 아 간판을 떼어서 그 글자를 지우고 강경성결교회 용화산기도소라 써서 간판을 걸고 사양산로에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오니...

경전 문화의 계승. 내가 한국의 성서 해석학을 논할 때 주목하는 부분이다.
은산의 한 신자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경전을 접할 때 먼저 세수하고 의관을 정비한 후 두루마기를 입어야 하는 한국의 전통 때문에 부담을 갖고 있었다.
(송현강, <<대전·충남지역 교회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 173-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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