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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문화

한국의 추수감사절 수용

by 방가房家 2009. 1. 13.
방원일, <<한국 개신교 의례의 정착과 혼합현상에 관한 연구>> (문학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대학원, 2001), p.33-34.



추수감사절은 선교 과정에서 엘리트 전통에 의해서 부과되었다는 특성이 두드러진 절기 의례이며, 이 점에서 대중 전통에 의해 수용이 주도된 크리스마스와는 대조를 이룬다. 초기 추수감사절의 실천 양상은 이 점을 뚜렷이 보여준다. 추수감사절은 선교 개시 직후부터 수행된 의례가 아니며 한국의 교단 체계가 어느 정도 정비된 시점에서 실행되기 시작한 절기 의례이다. 1900년만 해도 한국 교회에서는 아직 추수감사절이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 1902년에 들어서야 이천의 감리교회에서 처음으로 추수감사예배를 올렸다는 기록이 등장한다.2) 이후 각 교단마다 달리 지켜지던 추수감사절은 1904년 장로교 공의회에서 통일적으로 지켜지기로 결의된다. 그리고 1914년 장로교 총회에서 추수감사절 날짜는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확정된다.3)

그런데 이 날짜의 결정은 선교사들의 입장을 강하게 반영한 것이었다. 1902년 첫 추수감사예배가 행해질 때만 해도 시행 날짜는 미국의 추수감사절 날짜에 비해 한 달 이상 앞당겨진 10월 5일이었다. 이것은 초기의 추수감사가 한국의 추수시기에 맞추어 추석과 비슷한 시기에 행해졌음을 암시한다.4) 이에 반해 1914년의 결정은 전통적인 삶의 리듬보다는 선교사들의 입장을 강변한 것이었다. 날짜가 11월 셋째 주 수요일로 정해진 것은 그 날이 ‘선교사 최초 도선일(渡鮮日)’이기 때문이었다. 추수감사절은 한국에 외국인 선교사가 최초로 도착한 날을 기리는 날로 시행되었다. 이러한 시행이 전적으로 엘리트 전통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추수감사절을 “외지(外地) 전도(傳導)를 위해서 예배하고 강도(講道), 기도, 연보(捐補)하는 날”5)로 규정한 것 역시 선교사가 중심이 된 엘리트 전통의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추수감사절은 엘리트 전통의 강한 신학적 관심을 내포하고 있는 실천이었기 때문에 혼합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전통적 절기 의례 중에 추석이라는 매우 유사한 역할의 의례가 있었고, 최병헌과 같이 그러한 유사성에 주목한 인물도 있었다. 그는 추석을 설명하면서 그 날은 조상에게 제사하기보다는 조상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께 드리는 ‘참제사’의 날로 삼자고 주장하였다.6) 비록 추속과 추수감사절을 직접 연결시킨 발언은 아니지만, 그의 주장은 추수감사절을 추석으로 대체할만한 신학적 바탕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의 추수감사절 수행에서 그러한 식의 이해는 거부되었다. 예를 들어 1900년도 『신학월보』의 기사에는 추석을 부정하고 추수감사절을 수행하자는 주장이 실려 있다. 그 기사에서는 추석에 대해서는 “하나님 은혜로 얻은 추수 감사를 집안 귀신에게 굿하여 주는 것은 하나님의 물건을 악신에게 드리는 것”7)이라 하여 적극적인 반대의 입장을 보였다. 그리하여 1902년의 첫 추수감사예배가 행해질 때 회중에게 제기된 질문은 “우리가 누구에게 제사를 드리겠느냐, 하나님이냐 혹 마귀냐?”였다. 회중은 두려움에 떨며 양자택일을 강요당했던 것이다.8)

추수감사절의 실천에는 전래의 행위와의 혼합을 통한 정착이 아니라 배제를 통한 이식의 의도를 강하게 갖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한 신학적 의도, 몸에 익은 절기와의 단절로 인해 추수감사절은 개신교 대중 전통에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양력의 보급이라는 조건에 의해서 동지를 흡수 대체할 이유를 갖고 있었던 반면에, 추수감사절의 경우에는 추석 대신에 준수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대중 전통에 의해 추석은 확고한 명절로 계승된 반면에 추수감사절은 교회에서 근근이 지켜지는 절기 의례로만 유지되었다. 최근의 개신교 예식서에 추수감사절이 따로 실려 있지 않고 추석으로 대체할 것으로 권고하고 있는 것9)은 이러한 대중 전통의 실천이 반영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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