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덮인 옛 독서 메모를 정리하다.
리처드 니버, 김재준 옮김, <<그리스도와 문화>> (대한기독교서회, 1998).
기독교 문화를 논하는 고전적인 저서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발제. 나는 이 책이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논하는데 있어 고전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종교와 문화”를 논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에서 제시하는 다섯 유형은 잘 알려져 있지만, 종교문화의 현실을 편리하게 재단하는데 남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니버의 도식은 신학의 미세한 결을 잠정적으로 나누는 미묘한 맛은 있지만, 분석적인 범주로서는 설득력을 느끼기 힘들었다. 이 발제문의 전반부는 내용요약, 후반부는 비평적인 문제제기로 되어 있다.
Ⅰ. 다섯 가지 관계 유형
일단 니버가 제시하는 다섯 유형을 정리해 보자.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서 스펙트럼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부러움을 느끼면서.
근본주의자 이원론자 개변주의자 종합론자 문화주의자
------------------------------------------------------
①근본주의자: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2:15)”. 이 입장에서는 기독교 공동체와 세속 사이의 절대적인 단절이 전제된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형제들 사이의 결속이 강조되는 반면에, 문화는 악의 세계로 규정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부터 시작하여 이러한 태도는 전통적으로 문화에 대한 기독교의 대표적인 태도였다. 저자는 터툴리안의 신학을 예로 든다. 그에게 그리스도는 문화 때문에 미망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다. 종교, 정치, 철학, 예술 등의 분야들을 그는 극단적으로 배격한다. 그는 문화가 기독교에 침투하는 것을 철저히 봉쇄하고자 하였고,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문화를 타협시키려는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수도원 운동에 면면히 이어져 왔고 메노파, 퀘이커교와 같은 소종파들에서도 나타난다. 현대의 톨스토이의 태도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과 문화에 대한 철저한 투쟁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문화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러한 입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문화와의 분리를 주장한 근본주의자 역시 문화를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요한1서의 기자는 그가 배격하는 영지주의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였다. 터툴리안은 그가 말하는 거의 모든 경우에 자기가 로마인이라는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만날 때,... 그들의 문화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90-1)”.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그들이 그리스도에 순종하는 방식을 제시할 때, 사실 그것은 비기독교적 문화로부터 차용된 것이다: “터툴리안이 절제와 인내를 권면하는 경우에 언제나 나타나는 것은 스토아 철학의 내용이었다. 톨스토이가 무저항을 말하는 경우에는 루소의 사상이 그 안에 담겨 있다(93-4)”.
②문화주의자: 문화의 그리스도
근본주의자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입장에서는 그리스도를 문화와 아무런 충돌 없이 조화시킨다. 이들은 초월적 세계와 현세간의 간극을 인정하지 않고 그 연속선 상에서 문화의 성취를 통해 그리스도를 설명하고자 한다. 기독교 초기에는 영지주의가 이러한 경향을 대변한다. 그들은 당시의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체계를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문화 생활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 성취의 절정에 이르러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중세의 아벨라르는 예수를 최고의 도덕 교사로 여겨서, 그리스도를 문화 내의 최선의 요소와 일치시켰다.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은 이러한 입장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중에서도 리츨은 칸트의 도덕관을 적용하였던 신학자로 그 대표자라 할 수 있다.
문화주의자들의 노력은 그리스도의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의의를 지닌다. 근본주의자들이 보수적인 문화를 지지했던 것에 비해서, 문화주의자들은 새로 확장되는 문화 영역에 기독교를 적용시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또한 그들은 한편으로는 근본주의자들이 놓치는 예수의 모습을 지적해 냄으로써 균형을 잡아주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며(134-5),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가 전적으로 악의 세계가 아니라 예수가 긍정하는 측면들이 섞여있음을 지적한다(136).
그런데 니버는 문화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 공유하는 토대를 지적한다. 극과 극은 역설적으로 통하는 점이 있고, 또한 이 지점들이 양자의 신학적인 난점으로 지적된다. ⑴죄의 문제. 한마디로 원죄 개념의 부재. 근본주의자들은 기독교 공동체를 순수한 선으로 보았고, 문화를 악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에는 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전승되는 것이라는 관념이 깔려있다. 문화주의자에 있어서도 악은 문화에 존재한다. 다만 문화에는 좋은 문화와 나쁜 문화가 있어서 정련을 통해 나쁜 문화의 악을 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⑵율법과 은혜의 긴장에 대해서. 두 입장 모두 신에 의한 은총보다는 인간의 노력, 율법에 의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⑶삼위일체의 문제. ⑷(근본주의의 경우에만) 이성과 계시의 긴장에서 계시만을 중시.
③종합주의자: 문화 위에 있는 그리스도
종합주의자는 하느님과 인간의 구분선을 명확히 하는 것은 전제로 하면서도 문화주의의 입장에 좀더 가까이 자리한다. 그들은 문화의 가치를 무시하지 않는다. 문화와 그리스도가 일치하지는 않지만 문화의 궁극적인 진행 방향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문화 내에 포섭되지는 않지만 문화가 추구하는 지점에 자리하는 이상형으로 존재한다. 중세 사회는 바로 이러한 관계성을 구현한 사회였고,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이를 대표한다: “그는 교회 안에 있는 수도사이면서도 또한 문화의 수호자, 학문의 육성자, 국민의 재판자, 가정의 보호자, 사회적 종교의 통솔자였다. 토마스란 인물 안에서 상징화된 이 위대한 중세기 조직체 자체가 놀랄 만한 실제적 종합의 결과를 드러낸다(164)”. 종합주의의 모티프는 2세기의 클레멘스, 근대의 버틀러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니버는 종합주의의 문제로 과도한 결정성, 고착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문화,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 법과 은혜 등을 사상과 실천의 한 체계에 넣어버리려는 노력은, 결국 거의 불가피하게 상대적인 것을 절대화하고 무한한 것을 유한화하며 생명적인 것을 물질화하는 경향을 가지게 될 것이다(182)”. 결국 하느님의 법칙에 대한 견해와 그 법 자체를 동일시하는 문화적 기독교의 일종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종합주의적 노력은 문화적 보수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④이원론자: 역설적인 관계를 가진 그리스도와 문화
그리스도와 문화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양자의 이질성을 강조하는 것이 이원론자의 입장이다. “은혜는 하느님 안에 있고 죄는 인간 안에 있다(192)”. 이들은 근본적으로 부패한 문화에서 살아가면서, 하느님과 항시 대면하는 실존적인 정황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계시와 이성, 율법과 은혜, 창조주와 구속주 등의 대립 속의 긴장이며, 이는 역설의 언어로 표현된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울이다. 그에게는 “하느님이 선하시므로 사람을 선하게 만들려고 원하는 선과,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 안에 가지려고 추구하는 독립적 선의 두 가지(202)”가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영역은 이질적인 것이어서 종합주의에서와 같은 인간의 선, 즉 문화의 부분적인 성취조차도 인정되지 않는다. 그에게 문화는 소극적인 기능밖에 지니지 않아서, “문화의 윤리는 그 자체로는 덕행이 없다. 기껏해야 비악덕의 윤리라 하겠다(209)”. 이 곳에는 잠정적인 가치만을 있을 뿐이고, 은혜는 전적으로 저 곳에 존재한다: "우리가 몸 안에 사는 동안은 주께로부터 떠나 있는 것이다(고후 5:6)“.
루터에서 보이는 이원적 체계의 긴장도 역설적 관계를 잘 보여준다. 그는 그리스도와 문화, 하느님의 나라와 세상을 나라를 구별하면서도(“하느님의 나라는 은혜와 자비의 나라다. 그러나 세상 나라는 진노와 가혹의 나라다(215)), 밀접한 관련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인간 생활의 문제점이 자기애, 이기심에서 근원하는 것이라고 파악하였는데, 그것은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는 근절될 수 없는 것이고 하느님 안에서 안전을 발견할 때만이 극복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도덕 생활의 근본 문제를 처리한다. 그는 행동의 원천을 정결하게 한다(218)”. 그리스도와 문화는 본질(what)과 방법(how), 정신과 기술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바울과 루터 외에도 마르키온, 키에르케고르, 트뢸취 등이 이원론적 동기를 보여준다.
이원론은 “‘중간시대’에 살고 있는 기독교인의 현실적인 투쟁을 반영해준다. 그리고 은혜의 시간에 살면서 그가 열렬하게 희망하고 있는 그 영광스런 시대의 윤리를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고 갈등 속에서 투쟁하고 있음을 반영시켜 준다(230)”. 기독교인 생활의 역동적인 요소를 인정함으로써 행동의 윤리를 제시한다는 점을 그 공헌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론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원론은 사회의 법칙을 상대화하기 때문에 반율법주의로 경도될 위험을 가진다. 또 문화의 기능을 소극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다른 말로 무관심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기에 문화적으로 보수주의의 태도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바울과 루터의 예에서 잘 나타난다. 신학적으로 볼 때는, “이원론에는 일시성 또는 유한성을 죄와 밀접하게 관련시킴으로써 창조와 타락을 매우 가깝게 근접시켰으며, 따라서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234)”.
⑤개변주의자: 문화의 변혁자 그리스도
개변주의자(conversionist)는 이원론자에 가깝지만 그들보다 문화에 대한 태도가 더 적극적이고 희망적이라는 점이 다르다. 니버는 개변주의를 가장 균형잡힌 입장으로 평가하는 것 같은데, 그 평가는 신학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는데서 드러난다: ⑴창조에 대하여. 창조에 비해 속량을 강조했던 이원론자와는 달리 개변론자는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과 하느님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는 두 주제를 모두 놓치지 않고 있다: “피조물인 인간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통치 밑에서 창조적인 능력과 하느님 말씀의 질서화에 의해서 살고 있다(241)”. ⑵인간론. 이원론자가 창조와 타락을 근접시킨데 반해, 개변주의자는 타락을 창조와 구분한다: “타락은 창조의 반대이지, 결코 그 계속이 아니다... 하느님을 배반한 인간에게 미치는 결과는 인간 편에만 나타나지, 하느님 편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243)”. 문화는 부패되었지만, 근본적으로 악이 아니라 전도된 선이다. ⑶역사관. “역사가 근본적으로 다만 인간이 만들어 내는 사건들의 과정이 아니라, 언제나 하느님과 인간의 극적인 상호행동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역사 안에서 하느님은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역사관(244)”. 그들은 만물을 끌어올려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지각한다.
개변주의의 주제는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복음서는 복음을 그리스 개념으로 번역하여 문화를 새로운 수준으로 상승시켰다는 점에서 문화적 개변 자체이기도 하다. ⑴이 복음서는 창조에 대한 진술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사랑이 표현되어 있다. ⑵창조된 세계는 근본적으로 선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응답 속에서 자기 모순이 발생하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타락 사상, 선의 전도라는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이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예수의 응답과 창조주에 대한 인간 세계의 응답을 끊임없이 대조함으로써 잘 드러난다. ⑶역사관에 있어서, 역사 안에 있는 시간적 차원, 즉 과거와 미래가 영원과 시간의 관계에 다분히 종속되어 있다(251).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이 ‘영생’이라는 말로 대치되어 있다.
Ⅱ. 문화에 대하여
1. 문화 개념들의 다양성
니버는 글 초입에서 다음과 같이 문화의 정의를 내린다: “문화란 것은 인간이 자연적인 것 위에 억지로 뒤집어씌운 ‘인공적인, 제이의 환경’이다. 이것 언어, 관습, 이념, 신념, 전통, 사회조직, 전해받은 공예품, 기술적 진전 그리고 가치 등으로 구성된 것이다(47)”. 그러나 이러한 개념 설정이 너무 허술했던 탓일까, 니버가 제시하는 다섯 유형에서 문화는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니고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근본주의자에게 있어서 문화는 ‘세상’과 동의어로서 나타난다. 기독교 공동체라는 배타적 공동체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문화라는 말 속에 포함된다. 그야말로 문화는 세상 모든 것이어서, 국가나 정치, 교회, 심지어는 자연까지도 이에 포함된다. 이에 반해 문화주의자들에게 있어서의 문화 개념은 훨씬 협소하게 적용된다. 이 때 문화는 일반적으로 일컬어지는 문화 중에서도 발달된 영역-흔히 문명이라고 지칭되는 영역-을 지칭하게 된다. 그것은 “문화 생활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인간성취의 절정(115)”이며, “문명 속에 섞여 있는 위대한 극성(極性)들(136)”이다.
한편 니버는 위의 두 입장 사이에 있는 중립적 입장들에서 사용되는 문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주고 있다. 이 입장에서는 문화를 자연에 개념으로 설정한다. 그런데 이 자연은 선한 것이며 하느님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문화란 적어도 자연으로서의 ‘세상’ 위에 건설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창조주요 통치자이신 이에 의해서 긍정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151)”. 구체적으로 중립적 그룹의 문화 개념들은 다음과 같다. 종합론자의 경우에는, “문화를 그 기원에 있어서 신적이고 동시에 인간적이며, 거룩하면서도 범죄적이고, 필연과 자유를 함께 가진 영역이며, 이성과 계시가 함께 적용되는 장소(155)”로 본다. 반면에 이원론자들은 문화를 소극적 기능으로서만 인정하고 있어 기껏해야 비악덕의 윤리 정도의 가치를 인정할 뿐이다. 문화는 살아가는데 불가결한 필요악 정도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개변주의자들의 경우는 인물마다 다르게 이야기될 수 있지만, 요한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세상’이라는 개념 안에 자연적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2. 관계를 말할 수 없음
이상의 개념의 다양성들을 고려해 볼 때 니버의 진술을 약간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기 보다는, 여러 신학자들의 문화에 대한 입장 변화를 서술하고 있다. 물론 인식의 변화는 개념의 변화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것이고, 니버는 이 변화를 적절하게 서술하고 있다. 내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사실 서술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책에서 ‘문화’가 분석 개념으로서의 지위를 지니지 못한다는 점에 대해서이다. 문화 개념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개념 고정에 입각하지 않고서 그것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난망한 작업이다. 문화의 개념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매우 가변적이기 마련인데, 이 변화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지적할 수 있는 문화 개념이 마련이 될 때에서야 관계 양상의 탐구가 가능하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이 책이 니버가 처음 의도한대로, 오늘날에도 첨예하게 제기되고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문제에 대해서 시사점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서구의 전통적인 문화 개념은 자연/문화의 대립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 점은 니버가 처음에 제시한 문화 개념에서도 강조된 것이었다. 그러나 글에 제시된 사례들에서 이 대립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있다. 이 대립을 무시함으로써 니버는 세속과 종교라는 전통적인 주제를 논의에 포괄하고 있지만, 애초의 의도에서는 벗어나고 있다.
3. 몇몇 문제
위의 논의에서 마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문화 개념의 변화가 과연 관계 유형의 변화에 말미암은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오히려 그 변화는 시대에 따른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문화의 개념이 다른 것이, 그들이 근본주의자이기 때문에, 종합론자이기 때문에, 문화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인지, 그 때가 초기 기독교 시기여서인지, 중세여서인지, 근대여서인지가 가려져야 한다. 더 심하게 얘기해서 그것을 말한 사람이 어거스틴이기 때문에, 루터이기 때문에, 요한이기 때문에 문화 개념이 달라진 것일 수도 있다. 만약 문화 개념의 변화가 입장의 차이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대상의 변화, 혹은 개인차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니버의 구분 작업은 무용한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송천성이 지적한 대로, 이 책에서 논의된 문화는 그들의 문화라는 점이다. 니버는 분명 서구 문화를 말하고 있으며 보편적 문화를 말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더구나 앞서 말한대로 문화를 말하고 있으면서 고정된 거점을 확보하고 있지 않기에 그 문제점은 더욱 도드라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제3세계 문화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말하는데 있어서, 니버의 논의는 참고 사항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예컨대, 니버는 선교사들의 배타적 태도를 근본주의자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타당한 지적이기는 해도, 그것은 표면적 유사성 이상의 사실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문화 개념 자체가 틀리다. 근본주의자의 경우 기독교 공동체를 제외한 새상 모든 것이 문화로 규정되어 배격되었다. 그러나 선교사는 정반대의 문화 개념을 사용한다. 그들은 일단 문화/자연의 구분을 존중하며, 이를 변형시킨 서구문화/야만의 구분을 선교지에 적용한다. 그들에 있어 그리스도의 외연은 서구 문화 전반에 확장되어 있다. 그들은 문화를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문화를 배격한다.
Ⅲ. 그리스도에 관하여: 질문으로 남는 것들
1. 니버는 ‘기독교와 문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문화’를 말하고 있다. 그 차이는 절대적이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신학 서적이다.
2. 그러기에 종교는, 기독교는, 교회는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낑겨 있다. 기독교는 문화로 서술되기도 하고 그리스도로 서술되기도 한다.
3. 종교라는 영역이 근대에 들어 문화담론체계의 일환으로 정립되었다는 사실은 이 논의와 관련성을 가질까?
4. “종교문화”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