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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데르레이우의 "힘"에 관한 논의

by 방가房家 2023. 5. 10.

먼지 덮인 옛 독서 메모를 정리하다.
이것은 판데르레이우(Van der Leeuw)의 대표작 <<Religion in Essence and Manifestation>>의 가장 앞부분인 “1.Power”와 “2.Theorizing about power”를 읽고 정리했던 내용이다.
잘 모를 때 읽었음에도, 전체 종교의 구조를 제시하는 레에우의 저작의 처음이 힘(power)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종교학사의 측면에서 볼 때, 마레트의 마나에 대한 이론이 종교학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지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기도 하다. 나는 뒤르케임의 토템 본체에 대한 강조와 레에우의 힘에 대한 논의에서, 마나에 대한 이론이 구체적인 종교현상들을 추상화하고 일반화하는 힘을 부여해주고 있음을 느낀다.

 

1.
“종교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레이우는 종교의 대상으로서 ‘무언가’가 존재하며 그것은 ‘뭔가 다른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여 논의를 시작한다: “우리가 종교의 대상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첫 번째 확실한 점은, 그것이 매우 특별나고 극도로 인상적인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23)”. 실존의 다른 차원에 대한 경험, 이것은 후에 엘리아데가 성스러움의 개념을 전개하는데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된다. 그가 성현(聖顯)을 일반적인 것과 구별시키는 출발점이 된 것은 역시 이 다름이었다. 그의 논의의 출발점은 레이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매우 비슷하다: “비정상적이고, 새롭고, 독특하고, 완벽하거나 괴상한 모든 것들은 일단 주술-종교적인 힘에 휩싸이게 되고 상황에 따라 경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Eliade, <<Patterns in Comparative Religion>>, 13. 이 논의 위에 엘리아데는 플라톤적인 색채를 덧씌운다. “어떤 영역에서든 완벽함은 두려운 것이다.... 완벽함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뭔가 다른 것이고 다른 곳에서 온 것이다.”) 사실 종교학에서 ‘다른 것=낯선 것=위험한 것=두려운 것=성스러운 것’이라는 등식은 기본적인 것으로 자리잡게 되며 풍성한 이론적 발전을 낳게 한다. 그러한 공식의 일단을, 레에우는 아주 소박한 그러나 힘찬 목소리로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레이우는 이 ‘다른 것’을 말하면서 어떠한 면을 강조하고 있는가? 일단 그는 이 관념을 성급하게 초자연적인(supernatural) 것, 혹은 초월적인(transcendent) 것으로 취급하지 말 것을 강권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을 다루기에는 너무 고급스럽고 추상화된 개념이다. 게다가, 그것은 서구 사회에서 통용되는―특히 가톨릭 신학에서 즐겨 사용하는― 범주로 종교 현상 일반을 설명하는 용어로는 부적절하다. 현상학자로서 레이우는 자신의 문화권이 주입하는 선이해를 괄호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서문에서 스마트가 강조하는 점도 바로 그러한 점이었다. 세계관(worldview)을 중시한 학자답게, 스마트는 레에우가 특정 문화권에 속하지 않은 범주를 사용하려 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인류의 보편적인 종교 경험을 기술하기 위하여, 레에우는 일종의 무대뽀 정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종교 경험은 좀더 투박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 생생한 삶의 경험으로부터 그것을 느낄 것. 그러기 위해서는 원시적인 심성으로까지 파고 들 것. 바로 이러한 고민에서 출현 한 것이 그의 '힘(power)'개념이다. 그리고 그가 힘 개념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마나(mana) 개념이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가 원시 종교를 중시하고 레비-브륄로부터 원시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바로 삶의 정직성으로부터, 경험의 직접성으로부터 힘의 개념에 근접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나는 흔히 알려진 것처럼 비인격적인 실체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난다. 영향력 있는 것, 힘센 것, 명예로운 것, 귀한 것, 머리 잘 돌아가는 것, 능력 있음, 특별한 힘 등은 모두 마나가 된다. “모든 비정상적인 행위는 힘의 경험을 낳고, 힘에 대한 믿음은 완전한 의미에서 실제적이다(25)”. 그것은 일반적인 힘으로 추상화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힘은 전혀 체계적으로 이해된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균질적이거나 단일하지 않다(26)”. 그리고 마법적인 관념으로도 치부될 수 없다. 마나는 식민 지배를 하는 서구인들이 가진 것이기도 하고, 교회 미사에서 사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힘은 그저 느껴지는 것이며, 그것은 특정한 담지자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 잊혀지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방아깨비를 잡은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놈에게서 힘을 좀 느꼈던 것 같다. 낚시꾼들은 월척을 통해 힘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노인과 바다>>에서, <<흰 고래 모비딕>>에서 증폭되어 나타날 것이다.
결국 이러한 힘에 대한 관념이 종교의 기초를 이룬다. 힘에 대한 직접적인 양상들이 축적되어 고대 사회에 이르면 비인격적인 힘의 관념이 나타나게 된다. 세계를 힘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 그것을 레이우는 ‘힘 숭배(dynamism)’이라고 불렀다. 그가 제안한 이 용어는 애니미즘 이전 단계라고 주장되어 왔던 아니마티즘이라든지 전(前)애니미즘 등의 종교 현상들을 포괄하는 것이다.


2.
힘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힘에 대한 관념이 발생하는 것, 그것은 반대되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힘의 특화(特化) 현상이다. 무정형(無定形)의 힘은 특정한 기능에 점착함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힘이 각각의 카스트에 속한 힘들로 분화하는 것이 그러한 경우이다. 또 정신적 에너지가 열의 관념과 결부된 타파스의 경우도 이에 속한다.
다른 하나는 힘의 보편화 현상이다. 이 경우 힘은 세계를 움직이는 동력, 우주를 운용하는 살아있는 힘으로 인식된다. 세계가 굴러가는 과정이 힘으로서 표상되어 나타난다. 이처럼 “자연과 우주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그려내는 흥미로운 스케치”는 일원론과 통하는 바가 있다. 이것을 힘의 일원론(dynamic monism)이라고 할 수 있다. 레에우는 힘이 이처럼 보편화되는 것은 고대 세계에서 폭넓게 일어났던 현상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의 도(道), 인도의 르타(rta), 이란의 아샤, 고대 이집트의 마아트, 그리스의 디케(dike). 이러한 힘들은 이론적으로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의 계산을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동하며 비인격적인 이러한 힘으로서 마나와 같은 성질을 지닌다(30)”.
힘이 보편적인 이론으로 나타날 때의 몇몇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는 앞서 지적되었던 바와 같이 힘을 통해 세계가 진행된다고 인식된다는 점이다. “원시적 환경의 혼란스러운 경험주의는 세계의 질서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대치되어 간다(31)”. 힘은 정적인 모습으로 추상화된다. 자연의 흐름의 추상화로서 만물을 생장시키는 원리로 나타나는 도는 사변적이고 신비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르타와 아샤 역시 세계의 질서로 표상된다. 두 번째는 이러한 힘의 관념이 신과 상관관계를 맺는 모습이다. 이는 둘 중에 하나이다. 힘이 신에게 복속되어 신의 능력으로 편입되든지, 아니면 힘이 신 위로 솟아올라 신을 통솔하는 원리가 되든지. 유대-기독교의 신은 전자의 경우를 대표하고, 그리스 신의 경우는 후자를 대표한다. 그리스의 디케 관념은 세계 질서에 대한 보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질서를 따른다고 해서, 냉혹한 필연성에 얽매인 숙명론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디케는 목적을 실현시키는 살아있는 힘으로 마나의 특성을 보존하고 있다. 그리스의 조무래기 신들은 이 관념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세 번째 모습은 이 보편적 관념이 우주론적인 특성 뿐만 아니라 인격적인 의미의 측면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 힘은 한 인생을 제어한다는 의미에서 인격적이게 되는데 이러한 양상은 앞서 본 디케에서도 볼 수 있다. 힘은 그것의 담지자인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어, 지금의 영혼 개념과는 다른 ‘영혼 물질(soul-stuff)'이라는 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이는 그리스의 프뉴마(pneuma)라는 관념에서 잘 나타난다. 이 개념은 이후에 다양하게 변화하게 되지만, 원래는 “힘에 대한 원시적인 관념이 영혼-숨 혹은 영혼의 호흡 물질이라는 원시적 관념과 함께 단일한 이론에 통합된(34)” 결과 생겨났다. 인격적으로 나타나는 힘 관념은 기독교사에서도 그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주님이 성령이라는 교리가 종종 무시된다. 오히려 예수와 성인이 힘의 현현으로, 교회는 그 충만한 힘을 받아들이는 장소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힘의 우주론적 측면과 인격적 측면은 동일한 원리로 통일되기도 한다. 인도의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바로 그러한 통일을 보여준다. 이에 이르러 “원시적이고 경험적이 힘 관념은 종교적인 일원론으로 발달한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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