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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 "마르셀 모스 전집 서문"

by 방가房家 2023. 5. 10.

레비스트로스가 쓴 <마르셀 모스 전집 서문>에 대한 요약문.

 
Claude Levi-Strauss, (tr.) Felicity Baker, <<Introduction to the Work of Marcel Mauss>> (London: Routeledge & Kegan Paul, 1987[1950]).
 
뒤르켐 학파 사회학자인 마르셀 모스의 전집 서문으로 1950년에 레비스트로스가 썼던 글이다. 이 글은 독립적으로 많이 읽혔고, 1987년에는 영문으로 따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짧지만 빈번히 인용되는 글이다. 특히 데리다가 <<글쓰기와 차이>>에서 인용한 것이 유명하다. "기표의 과잉", "떠다니는 기표", "상징가 제로" 등의 표현들은 이 글의 3부에 등장하는 것들로, 데리다에 의해 인용되어 알려졌다. 모스, 레비스트로스, 데리다라는 세 학자의 화려한 조우를 목격할 수 있는 글이다.
Introduction to the Work of Marcel Mauss
 
 
[1]
 
1. <<육체의 기술>>(Les Technique du corps(1934))에서 나타나는 모스의 현대성. 이 책에서 모스는 (후에 푸꼬에 의해 집중적으로 탐구되었던) 몸에 행사되는 기술이라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물론 푸꼬와 같이 몸에 행사되는 권력의 작용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모스는 사회의 상징이 몸에 아로새겨지는 과정을 탐구한다: "사회 구조는 어린이의 육체적 필요와 활동에 대한 훈련을 통해 그것의 흔적을 개인에 남긴다(4)". 이러한 문제 의식 아래 모스는 각 문화권에서 몸에 행해졌던 기술들에 대한 목록을 작성할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백과사전적인 작업이 될 듯. 그 작업을 통해 각 전통들에서 전승되어 온 몸짓의 의미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될 것이다. 이른바 육체적 습관의 고고학.
 
2. 사회학과 심리학의 관계에 대한 의미 있는 제안. 그것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모스는 우선 사회를 상징적 관계의 세계로 규정하며, 개인은 이러한 사회의 맥락 아래에서만 상징적 의미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사회가 관습이나 제도로 자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당연하다. 반대로 개인적 행위의 보통 모습들은 그 자체로는 절대로 상징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집합적일 수밖에 없는 상징적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12)". 이러한 의미에서, 개인의 신경증에서 상징을 읽어내는 정신 분석의 방법은 거부된다. 개인의 행위는 심리학적 구조라기보다는 사회학적 구조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스의 확고한 태도를 미국의 심리사회학파(루스 베네딕트와 마가렛 미드)가 미리 알았더라면 한 수 배울 수 있었을 텐데. 미국 인류학자들은 무던히도 공부를 안했나 보다.
 
이 문제는 주술을 규명하는 데에서도 제기된다. 흔히 심리학자들에 의해서 샤만의 빙의의 신경쇠약적인 측면이 지적되곤 한다. 그러나 무당은 미친놈이 아니다. 모스는 정상과 광기는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는 탁견을 제시한다. 그 진술 속에는 서구의 사회적 관계에서 규정된 광기의 의미가 다른 사회를 탐구하는데 무분별하게 적용된 것에 대한 반성이 들어있다. 미친 것처럼 보이는 무당의 행위는 오히려 사회적 구조에 의해서 요구되는 것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명백히 탈선적인 모든 행동 양식에서, '아픈' 사람들은 단지 집단의 상태를 옮겨 쓰고 있으며 집단 상태의 상수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들 위치가 공간 체계에 대해 상대적으로 주변적이라고 해서 그들이 전체 체계의 통합적인 부분이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들은 공간 체계만큼이나 통합적이다(18)".
 
 
[2]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total social fact). 이것은 <<증여론>>(Essai sur le don)에서 강조된다. 사회는 실체로서 규정되며, 사회에는 공시적 측면, 역사적.통시적 측면, 생리적.심리적 측면의 세 차원이 존재한다고 설명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회적 사실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진실된 것은 기도나 법률이 아니라, 이 섬, 저 섬에 살고 있는 멜라네시아인, 로마인, 아테네 사람이다(27)". 여러 제도들의 총체를 분석하는 것은 그것을 누리는 주체들의 삶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것은 주체와 객체의 일치라는 사회학, 인류학의 고유한 문제와 관련이 된다. "총체적인 사회적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것은, 단지 관찰되는 모든 것이 관찰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관찰자가 연구의 대상과 동일한 속성을 지니는 학문에서, 관찰자 자신이 관찰의 일부라는 것을 의미한다(29)". 주관적 이해를 통한 총체의 이해, 또는 외부자가 내부자의 통찰을 받아들이는 것, 즉 주체의 객체화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이 가능할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철저한 참여조사를 위주로 한 미국 인류학의 경험주의적인 방식 대신에, 레비-스트로스는 모스에게서 자료의 분석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발굴하고 발전시키고자 한다. 여기에는 심리학적인 고찰이 부가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주객이 서로 만나는 지점', 그리고 '자아와 타자를 매개하는 항'으로서 무의식을 상정한다. 연구의 성패는 분석이 그 지점에 도달하였는지의 여부로 판가름나게 된다. 레비-스트로스는 모스가 무의식을 강조한 것을 이러한 맥락에서 읽고 있다. 모스는 무의식이 사회적 사실의 공통된 성격과 특수한 성격을 동시에 제공해 준다고 간주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비지성적 심리학(unintellectualist psychology)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에 관련되어서 사회적 사실의 네 번째 차원으로서 마나의 개념이 언급된다. "마나의 차원에서 무의식 범주의 개념과 집합적 사유의 범주 개념이 종합된다(35)". 이러한 분석을 통해서 인류학의 분석은 결국 상호소통의 문제가 된다. 그런데, 상호소통의 지점으로 무의식을 상정했다는 점에서 융(Jung)과의 유사점을 생각할 수 있는데, 레비-스트로스는 양자를 근본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왜냐하면 무의식을 집합적 사유의 범주로 규정하는 것과, 무의식을 그 내용의 개인적 혹은 집합적 성격에 따라 부분들로 분할하는 것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36)". 융에게 있어 무의식은 체계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들의 창고일 뿐이다. 그러나 모스에게 상징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체계를 이룬다. "상징은 그것이 상징하고 있는 것보다 실재적이다. 기표는 기의에 선행하며 그것을 결정한다."(37)
 
마나로 대표되는 이 더 깊은 차원의 실재의 체계는 그 유통가능성으로 인해 자료의 분석, 분류, 비교를 가능케 한다. 그것은 수학의 공식과 같아 방대한 데이터를 작은 수치로 치환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자료들의 약분을 가능케 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조작이 집단이나 사람들을 작은 수의 조작으로 환원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며, 이 조작에는 단지 근본적인 등식이 남아있을 뿐이다(39)".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조작 기술에서 구조언어학과의 연결을 발견한다. 그런데 막상 모스는 이러한 조작을 제대로 성립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모스의 통찰은 그 후 색이 바래게 되었다. 특히 말리노브스키의 기능주의가 그러한데,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경험주의적인 퇴행이라고 강력히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모스와 말리노프스키의 기능 개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모스는 사회적 가치가 서로간의 기능으로서 인식할 수 있음을 암시하며, 대수학의 범례를 좇아 기능 개념을 추론하였다. 반면에 말리노프스키는 나이브한 경험주의로 보이는 노선을 따라 기능의 의미를 변형시켰고, 그래서 그 말은 관습과 제도의 사회에 대한 실용적인 쓸모 이외에 다른 것을 가리키지 않게 되었다. 모스가 현상의 영속적인 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그것이 설명의 터가 되었던 반면에, 말리노프스키는 단지 현상의 정당성을 찾기 위하여 그것들이 어디에 쓰이는 지에만 의문을 가졌다(42-43)".
 
 
[3]
 
여기서 레비-스트로스는 모스의 통찰을 자신의 이론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그는 모스를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죽은 모세에 비유하였고, 그래서 자신은 여호수아의 위치에서 그 꿈을 완수하고자 한다. 모스의 증여론에서 나타나는 교환 개념은 '명백히 이질적인 방대한 사회 활동들에 대한 공통 분모'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교환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구조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구조의 단편들이 교환의 근원이 된다. "교환되는 물건들에는 선물을 순환케 하고 주고받게 하는 속성이 있다(46)". 레비-스트로스는 이 힘을 이론화시키는 작업을 전개한다. 모스는 하우(hau)라는 '뉴질랜드인의 이론'을 적용하였지만,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그것은 좀 불만스럽다. 물론, 현상에 대해서 서구의 준거를 적용하지 않고 토착민들의 세계관을 통해 설명하였다는 것 자체가 진보이며 모스의 탁월한 점이기는 하다. 그러나 여러 민족들의 토착적 이론들 사이에는 밑에 공통적으로 깔려있는 실재가 존재하며, 그것은 언어적인 특성을 통해서 탐구될 수 있다는 것이 레비-스트로스의 전제이다. 즉 세계에 두루 존재하는 마나 유형을 보편적 사유의 방식으로 이론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서구에서 마나 타입에 상응하는 것으로, 영어의 'oomph', 불어의 'turc', 'machin(우리말의 거시기에 해당)' 등의 속어를 찾는다. 그리하여 "언제 어디서나, 수학 기호와 같은 이러한 관념의 유형들은 의미작용의 비결정적인 가치를 나타낼 때 발생하며, 그 자체로는 의미가 비어있고 그래서 어떠한 의미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 그들의 유일한 기능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틈을 채우는 것, 혹은 더 정확히 말해서 그러한 환경, 그러한 발생, 그들의 나타남의 경우에 부등의 관계가 기표와 기의 사이에 성립되며 그것은 먼저의 보충적 관계에 손해가 된다(56)".
 
하우나 마나는 "상징적 사고에 직접적으로 주어진, 또 그것에 의해 주어진 종합이며, 다른 형태의 의사소통과 마찬가지로 교환에서도 그것은 그 안에 내재된 모순성을 극복한다(58)". 상징에서의 통합과 논리적 모순,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징과 지식에 대한 구분이 전제되어야 한다: "인류 역사에는 불연속으로 특징지워지는 상징과 연속성으로 특징지워지는 지식 사이의 근본적인 대립이 존재한다... 기표와 기의의 두 범주는 보충적 단위로서 순간적으로 그리고 독립적으로 구성된다. 반면에 지식, 즉 우리로 하여금 기표와 기의의 측면을 인식 가능하게 하는 지적 과정은 매우 천천히 시작된다.(60)". 기의에 맞추기 위하여 기표를 균등히 하는 작업이 과학은 현재 천천히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기표가 전체를 이루고 있고, 이에 반해 기의를 어디에 배당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인간의 태생 조건을 이루고 있다. 거기에는 맞지 않음과 넘침이라는 부등과 부적합이 존재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맞추어져야 할 기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표의 과잉이 나타나게 된다. "사용가능한 기표와 할당된 기의는 상징적 사고의 실행의 조건이 되는 보충성의 관계 내에 남아있을 것이다(63)". 이러한 의미에서 지금까지 마나 유형이라고 지칭되어 온 것을 레비-스트로스는 '떠다니는 기표(floating signifier)'라고 지칭한다. 요약해 보면, "모든 사회 현상은 언어와 동질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모스의 통찰을 받아들여, 나는 마나, 와칸, 오렌다, 그리고 다른 동일한 유형의 다른 관념들이 기호적 작용(semantic function)의 정확한 표현이라고 본다. 그들의 역할은 상징적 사유가 그 안에 내재된 모순에도 불구하고 작동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우주론을 구성하는 상징 체계 내에서, 그것(떠다니는 기표)은 정확히 영의 상징가(zero symbolic value), 즉 기표가 이미 담고 있는 것 위의 보충적 상징 내용의 필연성을 나타내주는 기호이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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