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 기독교를 통해서 기독교 선교와 자본주의 유입의 관계를 분석하는 진 코마로프의 <<Body of Power, Spirit of Resistance>>의 후반부 6, 7, 8장에 대한 발제. 이 책의 전반부는 역사적 배경을 개괄한 내용이고, 본격적인 분석은 후반부에서 이루어진다. 특히 7장에서 다양한 시온교회 교파들의 의례와 상징들의 분석을 통하여 경제적 갈등이 상징체계로 어떻게 맺혀 나오는지를 분석한 부분이 압권이었다고 기억된다. 이 발제문에서는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다.
코마로프 부분의 주저서인 <<Of Revelation and Revolution>>(1-1이하 발제문들 참조)이 분량 때문에 부담스럽다면, 이 책은 그나마 덤빌 만 하겠다. 전자가 기독교 선교의 역사적 과정에 대한 분석이라면 후자는 현대 시점에 더 가까운 사례들을 다루고 있다.
Jean Comaroff, <<Body of Power, Spirit of Resistance: The Culture and History of a South African People>>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5), Chapter 6-8(pp.159-263).
6장 소외의 경험과 시온 왕국
1. 취디족의 사회문화적 상황
1970년대의 마페킹 지역 취디족의 경제적 상황은 주변지역과 흑인 프롤레탈리아의 형성이라고 요약될 수 있다. 공장의 노동력을 충원하기 위해 도시 주변부에는 빈민가가 형성되고, 이곳으로 대량의 노동자 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들은 거의 계약 노동자로 일하고 있으며, 노동 공급 과다로 인하여 매우 불안정한 고용상태에 있다. 이들은 극빈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한편 화폐 경제의 유입은 이들의 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것은 전통적인 (선물) 경제 체제와 긴장을 일으켰는데, 1960년에도 95%의 사람들이 친척과의 현금거래를 나쁜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을 봐서도 이 긴장이 유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 취디 사회에서 화폐의 역할을 한 것은 가축이다. 화폐 유입 이후 가축이라는 교환적 상징물의 의미가 변화하게 되었다. 가축을 소유한다는 것은 재산적 의미보다는 화폐 경제에 반대하는 저항적 의미를 취득하게 된다.) 화폐 경제에 의해서 자본을 지닌 소수와 나머지 사람들 간의 양극화 현상이 생겨났다. 전통적인 유대관계는 계급관계에 의해 대치되었고, 취디 공동체는 유기적 체계로서의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상의 사회 변화는 가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전통적인 가족 제도가 붕괴된다. 남자가 노동하러 나가야 하기 때문에, 가정의 영역은 거의 여성이 전담하게 된다. 가정에서의 부권의 지위는 상실되고 따라서 취디 공동체 내의 부권의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소멸하였다. 또한 전통적 결혼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혼모가 급격히 증가해서, 편모 가정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해진다.
가정을 기준으로 안과 밖을 설정하던 취디족의 우주론은 무너졌다. 가정에서 성인 남성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던 중심의 상징체계는, 노동 이주로 인해 바깥으로 사라졌다. 이들의 우주론에는 도시라는 낯선 공간이 등장하고, 도시와 농촌 간의 이동이라는 새로운 운동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이 통행은 국가 권력에 의해서 심하게 통제되었다. 이동을 규제하는 악법의 제정으로 인해, 통행금지, 공적인 도장, 하루종일 서는 긴 줄, 구금, 체포, 감시, 철조망 쳐진 길 등이 그들의 생활 공간을 조성하는 조건이 되었다. 그들의 시간, 공간, 이동은 국가 권력에 의해 와해되고 생경한 형태로 재조직되었다.
취디인의 취락에는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이 몰려들어 있다. 이들 건물들은 경제적인 중심과 주변에 상응하여 들어서 있다. 도시 중심에는 감리교 교회가 정통 기독교를 표방하며 자리잡고 있다. 그러고 여기서 떨어진 곳에서는 이 권위를 비웃듯이 조야한 형태의 교회들이 산재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시온 교회(Zionist) 혹은 성령의 교회(Spirit Church)이다. 이들 교회는 전통적 개념과 결합한 독자적인 교회 개념(dikereke)에 기반하고 있어 종교 외에도 정치, 경제 등의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이들은 몸을 중으로 한 의례를 수행하며, 이들 교회의 교인들은 서구의 권위를 패러디한 복장을 입고 다닌다. 취디인들에게는 정통 선교 교회로부터 잡다한 시온 교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교적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이러한 존재 양상은 취디인들 자신에 대한 정체성과 계급성에 대한 인식이 다양함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교회 스펙트럼의 다양성은 인식의 다양성에 사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노동계급화의 경험과 종교지형의 형성
취디인의 인식 체계는 일상에서의 몸을 다루는 상징적 조작에 의해 좌우된다. 그러므로 제의에 있어서도 개인의 체험에 존재하는 갈등을 치유함으로써 그로부터 비롯하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고자 한다. 전통적 입문식에도 잘 나타나 있는 바, 개인에서 사회에 이르는 도정에는 몽이 자리하고 있다. 이 때문에 여러 교회들의 의식에서 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인 것이었고 특히 그들의 성령(spirit) 개념과 몸과의 관계는 교리의 핵심을 이룬다. 취디의 교회사는 몸의 경험의 변화와 연관되어서 고찰되어야 한다.
①감리교회는 별다른 변화 없이 유지되어 오다가 분리정책 이후 큰 변화를 맞게 된다. 흑인과 백인이 따로 떨어진 교회에서 예배를 보게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 성직자의 지배는 유지되었다. 이러한 불평등에 반대하여 흑인들은 교회내의 평등과 권리를 찾으려 하였고, 이것은 교인들의 탈퇴, 교파 분열의 원인이 된다.
②감리교에서 말하는 부르주아적 가치, 즉 자유주의적 이상은 프롤레탈리아들의 경험과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다. 감리교의 교리는 그들의 소외의 경험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취디인들에게 있어서 임극 노동은 자신들의 삶의 영역과 전혀 무관하였고, 오히려 노동의 결과가 삶의 본체를 갉아먹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은 그들의 돈을 나타내는 명사 ‘madi'에 잘 함축되어 있다. 'madi’는 영어의 ‘money’로부터 발음을 따서 만들어진 말이기도 하지만, 원래 피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 동음이의(同音異義)에 의해 ‘돈=피’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그들은 돈을 지불하며 “이것은 나의 ‘madi(돈/피)’야”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소외의 경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또한 피는 부정한 더러움인 열(Bothith) 관념과 연결되기 때문에, 돈에는 다시 관계의 훼손이라는 의미가 함축된다.
③이러한 노동 계급의 인식을 객관화하는 문화적 논리가 새로운 두 가지 종교 운동으로 나타난다. 그중 먼저 나타난 것이 독립교회(African Independent church)이다. 독립교회는 기독교 상징 체계와 아프리카 민족주의를 결합시켰다. 그들은 그럼으로써 서구 정통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 모순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도전하지 않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기 때문에 이후에 큰 교세 확장을 하지는 못했다.
④시온 교회는 정통 교회와 백인의 세계관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감행했다. 그들의 핵심 메타포인 치료를 통해서, 그들은 물질과 영혼의 재통합, 신의 힘의 실질적 대행, 사회의 전치된 관계의 재조정 등, 식민화 경험에 의해 분리된 모든 것들을 재결합하고자 하였다. 시온이라는 이름 자체가 초월적 구원에서 임박한 유토피아로 관심을 돌렸음을 시사한다.
3. 시온 교회의 문화적 논리
ㄱ. 미국 시온 교회
시온 교회(정식 명칭은 The Christian Catholic Apostolic Church in Zion)는 1896년 미국 시카고에서 설립되었다. 이것은 도위(Dowie)라는 목회자에 의해 설립되어 미 동부 공업지역에 전파되었다. 그들은 돈을 모아 시온 도시라는 독립된 공동체를 건설하여 성화된 공간으로 조성하였다.
이 교단의 특성은, 육체에 의해 일어나는 변화를 중시하며 이를 통해서 몸과 환유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를 치유하려고 한다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율법이 몸의 변화, 식습관, 성교, 일상적 시공간의 조직화에 깊이 관여한다. 몸의 치료와 사회 갈등의 관련성, 병치료의 사회적 상징성은 현재 인류학에서 많이 지적되고 있는 주제이기도 한데, 시온 교회에서는 이를 헤게모니 문화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치유라는 측면에서 설명한다. 이들은 개신교에서 내세우는 공리주의적 개인주의, 인간 성취의 신화들, 그리고 그 주장의 전제가 되는 영혼과 육체, 교회와 세계의 분리를 배격한다. 시온 교회의 몸 치료가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것이 영/육, 교회/세계의 분리를 치유하고 원래의 통합성을 되찾아주는 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들의 신개념은 정통에 비해서 상당한 물질적 권능을 지니고 있어 주변부의 빈곤을 퇴치하고 시온 교회를 부흥시킬 힘을 지닌 것으로 믿어진다. 또 성령에 대한 강조를 바탕으로 해서 영혼과 육체 사이의 구분을 극복하는 교리를 지니고 있다.
신체의 건강, 공업 생산품, 경영 사업, 정부 조직 형태. 이처럼 그들의 문화적 요소들은 현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새로운 문화 범주를 빚어내는데 사용되었고, 이러한 브리콜라쥬는 기존의 관계들을 새로 질서지우고, 시장 경제의 소외의 논리를 하느님의 원래의 비이원론적 규칙으로 대체하였다.
ㄴ. 남아프리카에 전파된 시온 교회
시온 교회는 설립된지 10년도 안 되는 1904년 남아공의 흑인들에게 소개되었다. 이처럼 시온교회가 빠른 속도로 남아공에 전파된 것은 이 교회를 수용한 양지역 집단이 지니고 있는 공통점에 근거한 것이다. 미국의 시온 교회는 동부지역의 빈곤화된 도시 빈민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19세기 개신교에서 내세웠던 자기절제와 이성적 성취라는 부르주아적 경험체계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회 구조는 미국과 남아공에서 동일하게 나타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양자가 기성 교단과 지배 문화에 저항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고 있었다는 점, 계급 갈등을 뚜렷하게 표명하기보다는 유동적인 기독교 상징으로 통해 표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도 접점을 찾을 수 있다. 아프리카에 전파된 시온 교회는 계속해서 교단 분열을 한다. 이것은 구조적으로 내장된 것으로, 이들 집단이 지도자의 카리스마에 의거한 소종파 운동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다. 이들은 성령의 은사에 의존하고 형상파괴적 자세를 지니기 때문에 카리스마의 일상화에 대한 거부감을 유지하고 있어 조직적 불안정성을 유지하고 있다.
ㄷ. 시온 교회가 남아프리카에 전파된 이후의 종교 지형의 변화
강압 통치가 시행되던 시기에는 많은 수의 취디인들이 명목상의 감리교도로 개종을 했다. 감리교회는 전통 사회에서 추장의 뜰이 지니던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자리를 물려받았으며, 취디의 공식적(official) 교파로서의 위상을 획득하게 된다. 2차대전 이후에는 시온 교회들이 급속하게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많은 정통 개신교인들이 시온 교회로 옮아가고, 20세기 후반의 종교 지형에는 정통 개신교와 시온 교회간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히 나타난다. 그 분화는 사회경제적인 양극화와 더불어 나타났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통 개신교회는 쁘띠 부르주아의, 시온 교회는 프롤레탈리아의 교회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온 교회의 출현이 사회적 양극화를 격화시킨 것은 아니다. 교회 내에는 소수이긴 하지만 다른 계층의 사람들도 같이 있었고, 이런 사람들은 게급 간의 갈등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였다. 사실 교회 인구 통계가 계급 비율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교회 비율은 일종의 신분 집단(status groups)이라고 표현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이다. 신분 집단이란 계급의 틔미한 집단 표상(blurred collective representation)으로 갈등이 고조된 상황에서만 윤곽이 드러나는 표상이다.
ㄹ. 정리
취디인들은 그들의 위기 상황에 내포된 구조적 모순을, 취디의 전통적 방식(setswana)과 백인 문화(sekgoa)라는 두 범주의 대립을 통해서 파악하고 있었다. 취디의 전통적 방식은 서구의 강제적 지배 이전의 추장 시대의 생산 방식과 사회 구조를 일컫는 말로서, 자급자족, 화페화되지 않는 교환 방식, 개신교와는 대립되는 논리를 지닌 제의 형식 등이 이에 속한다. 반면에 백인 문화는 임금 노동과 프롤레탈리아로 대표되는 사회 통제 기구의 세계이며 정통 개신교 교회의 세계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서 두 범주를 바탕으로 취디의 사회적 맥락에 반응하는 새로운 양식들이 출현하게 된다. 그것은 두 종교 전통으로 대별된다. 하나는 산업자본주의의 사회문화적 구조의 긍정적 측면, 호혜적 양상에 주목하는 이들로, 이들은 개신교 교회와 연합해 있다. 계급적으로 이들은 쁘띠 부르주아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백인 문화의 상징과 가치들을, 토착적으로 도출된 실천적 통제에 종속시키려는 이들로 이들은 주로 시온 교회에 소속해 있는 프롤레탈리아들이다. 이 양상을 통하여, 계급적 구분에 상응하여 제의적 초점의 대조, 이데올로기적, 실천적 질서의 구분이 형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
7장 역사적 실천으로서의 제의: 신식민주의 상황에서의 매개
정통 개신교와 시온 교회 간의 대조는 사회적 계층화의 뚜렷한 집단 표상만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이다. 그 대조는 세계의 변화가 인정되고 논의되는 상황을 규정해준다. 변화의 몸짓, 우리는 그것을 특히 시온 교회에서 볼 수 있다. 시온 교회의 상징과 행위들은 토착적인 사회 형태와 식민 문화의 보다 일반적인 흐름의 요소 간의 변증법을 통해 생성된 것들이다. 그들은 의식적인 행위자로서 현대 사회에 대한 저항의 논리를 조직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저항은 ‘도 아니면 모’식으로 나타나는 표면적 현상이 아니고 코드화된 운반체에 실려 있는 잠복된 형상이다. 반대하는 표현이 공개적인 담론의 위상을 획득하는 것이 금지되는 상황에서는, 권위적인 문화 코드에 대한 미묘하면서도 조직적인 위반만이 공유된 구조적 위기와 수탈의 경험에 뿌리를 박고서 모호하지 않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오직 면밀한 조사를 통해서만 이면에 있는 저항의 논리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7.1. 제의 형식과 문화적 형상파괴
담론들 사이에서 투쟁한다는 것, 이데올로기 내의 의미와 차이 사이에서 투쟁한다는 것은 항상 의미작용 내에서의 투쟁이다. 저항은 일상 생활의 세속적 영역에까지 확장되는 기호의 점유를 위한 투쟁으로서 전개된다. 아프리카의 역사는 침례할 수 있는 권리나 성찬식과 같은 지배 상징을 제어하려는 전투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유럽 정통의 가르침에 순응하지 않은 아프리카 ‘이단’들의 역사였다. 그런데 그 투쟁의 방식은 교파별로 차이가 있다. 독립 교회가 핵심적인 성스러운 기호들을 차지하려 하였던 반면에, 시온 교회는 성스러운 기호들을 급진적으로 재평가하였다. 정통 개신교와 세속적 문화로부터 핵심 기호들을 전유(專有)하면서, 시온 교회는 그것들을 자신의 성스러운 경치를 배경으로 하여 다시 자리잡게 하였고, 그것들을 일상생활의 후미진 곳에까지 확장시킴으로써 외부의 힘의 사로잡힌 담지자로서 자연화시켰다. 시온 교회의 전략은 상징의 재구성, 신크레티즘(syncretism), 브리콜라쥬이다. 이 전략은 기존의 상징적 결합을 붕괴시키고 전복한다는 점에서 형상파괴적(iconoclastic) 운동이라고도 불릴 수 있다. 시온 교회는 이러한 형상파괴적 브리콜라쥬를 통해서, 노동게급화와 식민지배를 논하고, 도처에서 핵심 기호들을 제어하고 환경에 스며들어 온 분열의 힘을 순치시키는 투쟁을 전개한다.
시온 교회에서의 성령과 물의 결합은 그러한 의미작용의 한 실례를 제공한다. 시온 교회의 중요한 개념이 성령은 ‘moya(숨, 생명)’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정통 개신교에서 강조하는 초월성보다는 물질적 기반이라는 차원에서 성령을 해석하는 것이다. 성령을 물과 결부시켜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경향을 심화시키는 것이다. 즉 성령/숨/물의 결합체는 실체적이면서도 유동적이고, 담겨질 수 있으면서도 자율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개념적 결합을 통해 시온 교회는 정통 교회와는 결별한 성령론을 제창하였고, 결국은 성령이 본체를 이루는 보편적인 신을, 수로를 통해 운반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제의를 통해 다스릴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켰다.
침례 역시 전통적인 물 개념과의 조우를 통해서 상황에 부합하는 의미를 획득한다.
7.2. 시온 참증인 사도교회
조직, 구성원, 모임, 큰집, N 주교(Bishop N.) 그의 행색
복장(남/녀), 음식규정 기타
7.2.1. 제의 형식
①시작, 음악 ②통성기도 ③간증 개인적 징병의 사회화, 언어화 제의 ④재구성 제의 ⑤원무와 성령 불어넣기 ⑥정리와 헌금
7.3. 시온 기독교회
규범성의 강조(38), 위계적 조직, 규모-
지역적 차원에서는 시온의 특성
차림새의 특성: 배지, 남성복장, 흰 부츠
예배 순서 :밖에서부터, 게시 소유, 지도자 찬양, 전쟁이미지
특이한 치유 과정
정리
8장 결론
1. 정리하며
지금까지의 논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취디인들과 유럽 제국주의의 초기 만남은 하나의 정합적인 상징 질서에 의해 매개되었고, 그 질서는 식민주의와의 대면을 겪으며 스스로 재형성되었다. 그 결과로 나타난 재구성, 브리콜라쥬는 상징 구성의 보편적 과정-즉 실행의 과정 중에 기호를 재배치하기, 새로운 연합을 산출하는 동시에 관습적 의미를 재생산하는 ‘텍스트’-의 한 예를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재구성을 특별히 요구하는 역사적 상황이 있다. 정복, 노동계급화, 위계 질서 내의 모순이 갑자기 첨예해 지는 경우와 같이 근본적인 구조적 균열의 상황에 놓이고, 그래서 전승되던 상징체계가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능력을 상실하는 경우, 기존의 상징에 대한 반대나 창조의 도입이 요구된다. 이러한 재구성의 의도적인 행위가 무지랭이(nonelite)들에 의해서 진행될 때에는, 경험의 차원에서의 불일치, 배운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 체계와 현실이 아구가 들어 맞지 않는 상태를 치유하고자 시도하는데 작업의 초점이 맞추어지게 된다. 그 노력에 있어서는, 또렷한 자기상을 제시하지 못하는 일반화된 교환 매체-화폐, 문자 언어, 직선작 시간, 보편신-의 운용이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이러한 교환 매체들이 상호소통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을 주변화시키는 주범인 셈인데, 그러므로 그들은 이것을 재구조화하여 권력을 획득하고자 한다. 시온 교인들의 화폐의 예에서처럼, 빈곤한 이들을 향해 가치의 흐름이 역류하도록 약속하는 의례를 통해, 가치의 저장고는 다시 자리매김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고통은 치유된다. 제3세계에서 저항적인 기독교들은 흔히 그러한 재공식화를 위한 용어를 제공하곤 하였다. 그들의 논리는 정통 개신교와 산업 문화의 기호를 전복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영혼과 물질의 재통합이나 혹은 긴밀한 사회도덕적 관계망으로의 주체 삽입을 통하여, 그들은 일반화된 매체의 순환을 재확립하고 잃어버린 가치와 의미를 복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시온 교회들은 바로 이러한 종류의 과업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퇴거당한 전통적 질서와 소외된 현대 사회 사이에 중간 지대를 창조하였다. 그들은 기성 교단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통합하는, 계급의 ‘틔미한 집단표상(blurred collective representation)'의 역할을 담당했다. 세계 문화의 맥락에서 볼 때, 이러한 그들의 활동은 이차 지구 문화(second global culture)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차 지구문화란, 일차 문화의 그늘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 체제의 저항적 주변부에서 생산되는 상상적 구성으로 이루어진 상징적 질서를 가리킨다. 그러한 맥락에서 서구의 반문화 운동과 아프리카, 남미, 카리브해의 저항은 같은 문화 권역에 속한다. 그들에게서는 동일하게 이성적 물질주의와 물화된 종교에 대한 반대가 나타난다.
2. 저항에 대한 고찰
취디인들이 펼친 저항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들이 열심히 상징 투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반문이 가능할 법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항이 펼쳐지는 마당이 지금까지의 정치 영역을 넘어서는 것임에 주목해야 한다. 그 마당에서는 정치-제의적 통제의 메카니즘이 생산, 교환, 성, 교육 등의 보다 산재된 영역에 부여됨으로써 중심화된 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진다. 그러한 의미에서 취디 질서의 역동성은 형식적인 권력 기구와 일상적 실천의 숨어있는 구조라는 두 영역을 뚜렷이 인식할 때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이 일상 영역에서 저항을 전개한 것은 역사적인 필연성을 가진 것이었다. 서구 제국주의가 그들에게 부과한 압제와 주변화의 과정, 그 속에서 기반을 뿌리뽑히고 노동자로 전락한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아무런 저항의 수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흑인 프롤레탈리아라는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여지도 주어지지 않았다. 가진 것은 몸밖에 없는 상황, 그것이 역설적으로 저항의 조건을 제공해주었다. 육체적 몸과 일상적 실천의 영역에서 그들은 권력의 직접적 통제에서 벗어나 나름의 의미적 맥락 내에서 자아의식과 서로간의 관계성을 형성하였다. 지배의 중심에 맞선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일상의 영역으로 투과해 들어오는 헤게모니에 투쟁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이 일상 영역의 수호라는 소극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전개한 시온 교회 운동은, 상징의 공동 재료를 끌어들이고 지역적인 동시에 지구적인 불평등의 관계에 관심을 집중하고 자신들의 메시지를 한정된 영역 너머로 확장시키면서, 더 넓은 사회 공동체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이들의 개신교에 대한 교파적 거부에 의해서 노동계급의 문화와 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주변에서 억압받는 자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사회적 유대와 도덕적 거부의 요람으로 작용하며, 여기서 길러진 상징적 저항은 계급 의식에 이르게 된다. 시온 교회 운동은 단지 하나의 천년왕국운동적인 소수집단은 아니다. 그것은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거대한 영역에서 일어난, 가치와 실천의 독특한 질서를 지닌 정합적인 반응이다.
이러한 사례를 검토하기 위해서 사회과학의 기본 용어들-예를 들어 권력, 동기화, 저항, 재생산, 변형-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저항의 경우, 주변부에서 일어난 운동들이 ‘원시적’이고 ‘전(前)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부르디외의 말대로, 직접적 개입과는 무관한 정치 질서를 재생산할 수 있는 메카니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고든(Gordon)에 따르면 저항의 범주는 원시적이거나 농땡이의 형태로 나타난 것을 배제해서는 안된다. 저항과 비저항의 이항적 분리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서구 사회 과학에는 역사적 과정과 인류학적 분석이 결합된 모델이 요구되며, 여기에는 주체와 객체, 지배와 복종의 상호작용(헤겔의 통찰대로, 주종관계는 불평등 관계이기는 하지만 상호 의존이므로)를 고려하고 사회 과정을 의미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변증법으로서 고려하는 방법론이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