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로윈이 지나갔다. 할로윈은 기본적으로 어린이를 위한 날이고, 그냥 놀며 즐기는 날이지만 희미한 종교적 기원을 갖고 있는 날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애들에게 할로윈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기원을 모르고 또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 기원에 대한 지식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이 종교현상의 중요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현상으로서의 이 날의 특징에 대해서는 경험이 좀더 쌓이면 정리하고 싶다. (이 포스트는 할로윈에서 비롯한 글이긴 하되, 할로윈에 대한 글은 아니다.)
나는 아직 이 날에 대해 그리 많이 알지 못한다.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내용에 더 보탤 것이 없다. http://blog.empas.com/kery89/4361455에 정리된 내용이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내용의 한 예이다. 앞부분을 조금 인용하면,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함께 할로윈 축제는 켈트족을 포함한 유럽인들이 11월1일을 '모든 성인들의 날(All Hallow Day)'로 지켜왔기 때문에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11월 1일) 전야제로 자리잡았다. ‘hallow’란 앵글로색슨어로 ‘성도’를 뜻하며, ‘All Hallows’ Eve(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가 줄어서 ‘Halloween’이 되었다.
할로윈은 “모든 성인 축일”(All Saint's Day)의 전날이다. 나의 관심은 이 한 줄을 어떻게 설명할까에 집중된다. 할로윈은 귀신들을 비롯한 갖가지 분장을 하고 노는 날이다. 할로윈과 기독교는 대칭적인 현상이다. 할로윈이야말로 악마 숭배의 날에 다름아니고, 온갖 잡스런 이방 신앙의 집합이 아닌가? (개신교 입장에서 나름대로 이 날을 의미화하려는 노력으로는 http://blog.empas.com/engame64/4395302과 같은 글이 예가 된다.) 그런데 이 날이 모든 성인 축일의 전야라니, 그 결합은 이상하게 보인다. 도대체 귀신과 성인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물론 종교 상징의 결합이라는 것이 논리적 이유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것이든 착각에 의한 것이든, 이유는 있는 법이다. (All Saint's Day에는 만성절(萬聖節)이라는 번역도 사용된다. 어느 번역이 좋은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 이 날을 지키는 곳이 가톨릭 교회라는 점을 감안하면 교회의 명칭을 따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의미가 분명하게 들어오는 좋은 번역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모든 성인 축일”은 어떤 날일까? 가톨릭 교회 달력에 있는 날이긴 하나, 오늘날 비중 있게 모셔지는 날은 아니다. 아마 가톨릭 교인을 붙잡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처음 듣는 날이라고 할거다. 예외적으로, 오늘 뉴스를 보니 존 케리 미국 민주당 후보가 “모든 성인 축일”을 모시러 성당에 갔다고 한다. 이 날이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마침 그 날이 투표 바로 전날이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말이 샌 김에, 부시가 종교 덕을 보는 후보라면 케리는 종교 덕을 지지리도 못 보는 후보이다. 케리는 가톨릭 신자이다. (역사상 가톨릭 출신 미국 대통령은 케네디가 유일하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에서 정치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 민주당 후보라 낙태와 이혼을 허용하는 정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토론회 때 케리가 말한 바 있듯이, 이 때문에 가톨릭 지도자들이 케리 당선을 반대하는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이야 케리에 많이 투표하기는 하겠지만...)
이 날의 신학적인 의미는 루디엔님의 포스트, http://blog.empas.com/puresoul00/4402857에 방대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분의 포스트를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가톨릭에 관한 자료를 어떻게 이렇게 정성스럽게, 또 방대하게 매일매일 정리하는지... ) 이 포스트에서 이 날의 기원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이 축일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 강생하시기 전에 이미 로마에는 여러 신들에게 봉헌된 웅대한 신전이 있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가지각색의 신들을 숭배하며, 더우기 자신들이 정복한 다른 민족의 신까지 모시고 있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무수한 신들에게 일일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므로 그들은 하나의 원형신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모든 신들을 합사(合祀)했다. 로마가 가톨릭의 혜택을 받자, 이 신전은 성당으로 개조되었으며, 전에 잡신들의 상이 있던 곳에 성인들의 동상이 들어섰을 뿐 아니라, 성인 순교자들의 유골이 카나콤바에서 그곳으로 옮겨졌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4세에게도 봉헌하고, 11월 1일을 기해 그들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모든 성인의 날의 시초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교 “잡신”들을 정복하고 그 위에 성인들을 가져와 기념한 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신학적인 정당화의 언어 이면에서 다른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로마의 만신전(pantheon)을 기독교가 성당으로 개조한다는 이야기는, 기독교사에서 “이방 풍습 세례하기”라는 주제와 연관된다. 이방의 종교 풍습을 기독교 체제 내에 위치시키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토착 신앙에서 성스러운 장소로 모셔지던 곳에 성당을 짓는 일, 아니 어떤 경우엔 이방 신전 건물은 그대로 두고 성상만 기독교 것으로 교체하는 일, 이방의 축일을 기독교 성인의 축일로 대체하는 일, 이방의 종교 의례가 기독교 것으로 채용되는 일... 기독교사에 많이 일어났던 일이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이방 종교에 대한 정복이다. 하지만 종교사적인 의미에서는 이런 일들은 “두 전통의 만남”의 양상으로 기술된다.
하필이면 다른 신을 모시던 그 곳에 성당을 짓는 것일까? 하필이면 다른 신을 모시던 바로 그 날에 성인이나 예수를 찬양하는 것일까? 그러한 방식으로 성스러운 시간과 성스러운 장소의 상징 체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이방의 상징 체계를 정복하여 채용한 것은, 기독교의 확장인 동시에 기독교가 변화하는 방식이다. 토착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라는 체제 안으로 들어가 존속하는 의미가 있다. 두 전통 모두 이 만남을 통해 변화한다. 교회 사람들은 싫어하겠지만 내가 선호하는 용어를 빌면, 혼합현상(syncretism)이라 묘사되는 종교현상이다.
하필이면 다른 신을 모시던 그 곳에 성당을 짓는 것일까? 하필이면 다른 신을 모시던 바로 그 날에 성인이나 예수를 찬양하는 것일까? 그러한 방식으로 성스러운 시간과 성스러운 장소의 상징 체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기독교가 이방의 상징 체계를 정복하여 채용한 것은, 기독교의 확장인 동시에 기독교가 변화하는 방식이다. 토착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라는 체제 안으로 들어가 존속하는 의미가 있다. 두 전통 모두 이 만남을 통해 변화한다. 교회 사람들은 싫어하겠지만 내가 선호하는 용어를 빌면, 혼합현상(syncretism)이라 묘사되는 종교현상이다.
“모든 성인 축일”에는 기독교 외부의 전통을 흡수한다는 배경이 깔려 있다. 그 날에 대한 신학적 정당화가 어찌 되었던 간에, 그것이 종교사적으로 그 날이 기능해온 방식이다. “모든 성인”이라는 용어가 왜 필요한가? 맨날 몇 명씩 성인을 모시면 되었지, 굳이 그들을 모아서 또 모시는 날이 왜 필요한가? 여기서 “성인”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기독교의 신앙 대상과는 좀 다른, 폭이 넓은 개념이다. 이 성인 개념의 확장성이 우리 논의의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사실 성인 개념을 기술하는 것은 매우 복잡할 뿐더러 지금 내 능력 밖의 일이다. (우리나라의 성인 개념을 더 복잡하다.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개념은 매우 희박해져 있다. 기꺼해야 본명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자기 세례명의 주인이 되는 성인이 뭐하던 사람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리고 모든 성인 축일에 관련되는 한에서 말한다면, 이 개념은 예외적일 정도로 확장성이 강한데, 두 가지로 이야기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성인이라는 말은 이방의 성스러운 신앙 대상들을 포괄하는 가능성을 지닌다. 이것은 앞에서 “모든 성인 축일”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약간 지적된 부분이다. 성인 숭배의 역사를 보면, 토착적인 신앙 대상들이 성인으로 변신해 기독교 체계 안에 들어오는 일들이 있다. 중세 유럽에도 흔히 있었던 일이고, 유럽 바깥에서 기독교가 선교될 때도 일어난 일이다. 기독교에서 악마, 마귀, 잡신, 귀신, 유령 등등의 단어들로 묘사되는 성스러운 존재들, 경우에 따라서 성인은 이들과 매우 가까워질 수도 있다.
둘째, 성인이라는 말은 죽은 조상들을 포괄하는 확장성을 지닌다. 루디엔님의 포스트를 다시 인용하면(저자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인용임을 다시 밝혀 둔다), 모든 성인 축일에서 성인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본래 성인이라면 교회에서 시성식을 거행해 내외에 선포한 이들만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간 영혼은 누구나 다 성인인 것이다. 그중에는 물론 덕행이 뛰어나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도 많을 것이나, 대부분은 성덕이 남에게 알려지지 않고 하느님께만 인정을 받아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시는 분들이다.
이것은 대단히 넓은 개념이다. (악인으로 낙인찍히지 않는다면야) 죽은 조상들을 이 범주로 집어넣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사실상 모든 성인 축일은 조상들을 기리는 날로 지켜져 왔다. 지금이야 중요한 날이 아니지만, 중세 교회에서 모든 성인 축일은 대단히 중요한 날이었다. 중세의 수도원이나 교회들은 각기 유럽의 유력한 봉건 제후 가문들과 연결이 되어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중세 유럽에서 모든 성인 축일은, 수도원이나 교회에서 특정한 가문을 위해 기도해주는 날이었다. 그 가문의 죽은 조상들을 위의 성인 개념에 포함시켜, 그들을 위해 연보기도를 해주는 날이었다. “우리 조상들 위해 기도 좀 해 주소,” 하며 영주들이 수도원장들에게 촌지를 찔러주는 시즌이었다. 그런 날이다보니 모든 성인 축일은 일년 중에서 교회에 기부금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당연히 중요한 축일일수밖에 없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조상 숭배가 성인 개념을 통해 기독교 안에 흡수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망자들의 영혼들이 귀신이고 유령이다. 기독교는 흔히 조상숭배를 귀신 신앙으로 치부해버리기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제사 문제도 그런 맥락이고... 그런데 기독교사에서 조상 개념을 긍정적인 면으로 해석한 사례들이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거칠게 말하면, 모든 성인 축일은 추석같은 날로 신앙되었고, 이 점은 이른바 토착화라는 주제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모든 성인 축일과 할로윈을 잇는 가느다란 끈은, “성인-조상-망자의 혼-귀신”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그 끈은 대수로운 것이 못 된다. 하지만 성인 개념의 융통성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모든 성인 축일과 할로윈을 잇는 가느다란 끈은, “성인-조상-망자의 혼-귀신”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그 끈은 대수로운 것이 못 된다. 하지만 성인 개념의 융통성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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