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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문화

탈랄 아사드, “의례 개념의 계보학을 위해”

by 방가房家 2023. 5. 10.

Talal Asad, <<Genealogies of Religion: Discipline and Reasons of Power in Christianity and Islam>> (Baltimore: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3), chap. 2.

아래의 글은 위의 아사드 책 2장에 대한 요약 발제문이다. ‘위해’(toward)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여러 측면에서 시론적인 성격의 글이다. 개념의 변화 과정 추적은 백과사전 참조로 간단히 이루어졌고, 사회적 배경의 탐구는 몇몇 인용으로 맛봬기로 처리되었다. 글의 시론적 성격과 산만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뚜렷하며 2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울림을 준다. 이를테면, “시국 법회에서 집전된 의례는 진정한 종교 의례가 아니다”는 식의 발언을 잠재울 수 있는 힘이 이 글에 있다.
사실 아사드가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상징인류학자들인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이 글이 인류학의 의례 이론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선을 긋기만 할 뿐 본격적인 이야기는 아낀다. 그가 반대할 법한 학자들의 이름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대놓고 비판하지는 않는다. 비판의 냄새만 풍기고 다음을 노리는 인상이 남는 글이다.


‘상징적 행위’와 ‘일상의 도구적 행위’를 반대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의례를 인식하는 것, 이것은 학자들의 공통된 전제이다. 아사드의 계보학은 이 상식을 문제시하는 것이다. 그는 근대에 의례 개념이 크게 변했다는 것, 그 변화에는 역사적 조건이 수반된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백과사전 항목을 통해서 그 변화를 인상적으로 보여준 후(1), 중세 기독교의 의례의 양상(2)과 근대 표현 개념의 전략화(3)와 내적 정신과 외적 표현의 분화 양상(4)을 성글게 보여준다. 그는 인류학 이론에 확고하게 남아있는 이 전제를 보여줌(5)으로써 논의를 마무리한다.
아사드가 “의례 행위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 진술에 딴지를 거는 의도는 무엇일까? 그는 ‘의미’를 운위할 때 생기는 이분법, 이분법에 의해 발생하는 매개체(medium)라는, 정치적 맥락으로부터의 진공 상태의 발생을 싫어한다. 정치적 상황과는 무관한 종교 고유의 무언가를 말하는 것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작업 의도라고 생각된다.

1-1.
 의례 정의의 변화: 1771년 <<브리태니커>> 초판에 실린 ‘리추얼’(ritual) 항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종교 예식을 행할 때 지켜야 할 순서와 방법을 지시한 책.” 이 사전에는 ‘라이트’(rite) 항목이 다음과 같이 별도로 실려 있다. “신에 대한 예배를 드리는 특정한 방법을 의미함.”
1910년 <<브리태니커>> 11판의 ‘리추얼’ 항목에서는 ‘의례’가 문화적 현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음을 보이는 큰 변화가 보인다. 의례는 종교의 보편적인 부분이며, 무언가를 표현하는 ‘상징적 행위’로 인식되었다. 의례는 근본적으로 의미 있는 행위(signifying behavior)로, 기술적 효과를 지니는 실용적 행위(practical behavior)와는 구분되었다. ‘리추얼’은 실질적으로 ‘라이트’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1-2.
 의례 개념의 변화에는 종교개혁기 신학적 논의와 관련된다. 브리태니커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사유가 부족했던 시대[원시 시대]에는 ‘외적 기호’(outward sign)와 ‘내적 의미’(inward meaning)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알지 못했고, 눈에 보이는 대로만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외적 기호와 내적 의미의 구분은 종교개혁가들의 담론에서 중심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구분은 타일러 이후 인류학의 해석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말리노프스키, 래드클리프-브라운, 리치, 터너, 이들 모두에게 의례는 모든 문화에 존재하는 표현적 행위(representational behavior)이고, 그 의미는 인류학자에 의해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 상징은 해독(decoding)될 필요가 있다는 전제는 기독교 해석학으로부터 인류학에 차용되어 발전한 것이다.

2.
 베네딕트의 <<수도규칙>>에서는 전례 수행이 수도승의 영적 기술의 도구로 사용된다. 중세 기독교 수도원에서 이루어진 것은 수련(discipline)을 통한 기독교적 자아의 형성인데, 이것은 본받음에 의해(by means of imitation) 이루어졌다. 성인의 모범을 따라 행동함으로써 덕을 함양하였다. 여기에는 외적 행위와 내적 동기, 사회적 의례와 개인적 감정 사이의 분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3.
 행위가 자아로부터 분리되었던 것은 파워 게임의 장이 마련될 때 가능하다. 근대에 이런 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은 베이컨의 논의이다. 베이컨은 개인이 표현을 어떻게 운용하는지를 분석한다. 개인은 아닌척하기(dissimulation)와 인척하기(simulation)를 통한 뼁끼의 처세술을 부린다. 표현적 행위는 전략적인 권력 사용의 맥락에 놓이게 된다. 겉 다르고 속 다른 행위는 해독을 요구한다. 행위의 공적 형태와 개인적인 생각과 느낌 사이에는 도덕적인 거리가 자아 내에서 유지된다.

4.
 사적인 본질/공적인 표현: 영국 르네상스기 연극에서 ‘캐릭터’(character)에는, 한편으로는 세계 내에서 알려지는 평판과, 다른 한편으로는 감추어진 본질에 해당하는 정신적이거나 도덕적인 구성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존재했다. 두 번째 의미인 정신적인 구성에서 발달된 개념이 ‘본질적인 정체성’이다. 형식적으로 나타난 것을 해석하여 본질적인 성격(character)을 알아내는 것, 성격을 판단하는 것이 요청된다.

5-1.
 인류학에서의 ‘감정’과 ‘의례: “근대 인류학은 어떻게 개인적이고 말로 할 수 없는 ‘감정’(emotion)과 공적이고 읽을 수 있는 ‘의례’ 사이의 구분에 이르게 되었는가?” 이 둘 사이의 대립은 근대 인류학의 의례 연구에서 오랜 전제가 되어왔다. 호카트는 그 대립적 상호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례는 감정에 의해 와해될 수 있는 지적인 구성물이다.” 이것은 열광적인 종교(enthusiastic religion)보다는 질서 잡힌 의례적 종교(ceremonial religion)을 선호하는 기본의 구도에 잘 맞는다. 감정과 의례의 관계는 개인적 경험의 우연적 성격과 언어의 체계적 성격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언어로서의 의례 개념이 나온다.
이런 이분법이 더욱 정교하게 제시된 것은 뒤르켐의 <<종교 생활의 기본 형태들>>에 등장하는 ‘이중적 인간’(homo duplex)이다. 여기에는 한편으로는 개인의 몸의 감각과 욕망이,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인 영혼의 개념과 의무가 존재한다. 이 인간 개념이 뒤르켐 의례 이론의 기초가 된다.

5-2
. 한편 뒤르켐의 이분법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모스에 의해 이루어졌음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모스는 “몸의 테크닉”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아비투스(habitus) 개념을 제안한다. 이것은 몸을 상징적 의미의 매개체로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밴 습성의 집적(the assemblage of embodied aptitude)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상징의 마음이 자연적 몸의 성향에 문화적 의미를 옷입히는 방식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피아니스트의 숙련된 손이 어떻게 공연 중인 음악을 기억하고 연주하는가를 연구하는 것이다. 그라네의 도교의 몸의 테크닉 연구를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신비 상태의 근저에는 우리가 아직 연구하지 못한, 하지만 중국과 인도에서는 충분히 연구된 몸의 테크닉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심리-생물학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하느님과의 교통’에 들어갈 생물학적인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모스의 접근은 몸의 감각(body sense)과 몸에 익음(body learning) 사이의 관계를 상호적으로 구성하도록 촉진한다. 어떻게 이 연구가 상징 인류학을 정초하는 텍스트로 읽힐 수 있겠는가?

6.
 미덥지 않은 최종 질문: 수련으로부터 상징으로, 덕성을 수행하는 것으로부터 수행을 통해 표현하는 것으로의 변화, 이것이 이질적인 생활들을 해독 가능한 텍스트로 바꾼 커다란 변화의 전제 조건 중 하나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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