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변하기 힘든 의례가 죽음에 관련된 의례들이다. 이는 추도 예배를 비롯한 현대 개신교의 죽음 문화의 양태에서도 잘 나타난다. 조선 전기에도 그랬다. 당시의 ‘새종교’였던 성리학의 주자가례를 통해 죽음의례 문화를 형성하는 시도는, 참으로 오래 걸렸고 완결되지도 않았다. 이전부터 죽음의례를 관장했던 불교와 무교의 의례들과 경쟁하고, 공존하고, 영향받고 때로는 결합하는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아래 정리한 김탁의 <朝鮮前期의 傳統信仰: 衛護와 忌晨齎를 중심으로>, <<한국종교>> 6(1990)는 위호(衛護)와 기신재(忌晨齎)라는 두 현상을 통해 유교 의례와 무속 의례, 유교의례와 불교 의례의 만남을 보여준다. 아울러 보아야 할 흥미로운 현상들이 많이 있다. 정처없는 영혼을 달래는 불교 의례인 수륙재(水陸齋)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희생당한 영혼들을 달래고자 했던 태조 이성계가 드린 것을 시작으로, 조선 왕실에서 꾸준히 거행되었다. [심효섭, <조선전기 수륙재(水陸齋)의 설행(設行)과 의례>, <<동국사학>> 40(2004).] 엄연히 유교 의례임에도 불구하고, 원한을 가진 영혼을 달래서 재앙을 피한다는 무속적 마인드에 기반하고 있는 여제(厲際)가 조선시대 내내 거행되었다는 사실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B . 왈라벤(Buodewijn Walraven), <조선시대 여제의 기능과 의식 -"뜬귀신"을 모셨던 유생들>, <<동양학>> 30(2001). 왈라벤의 이 논문은 요즘 읽은 조선시대 종교 관련 논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글에 속한다.]
얼핏 조선은 유교 사회라고 생각해 버리고 말기 쉽지만, 그 시대의 종교문화 지형은 그리 간단치 않다.
얼핏 조선은 유교 사회라고 생각해 버리고 말기 쉽지만, 그 시대의 종교문화 지형은 그리 간단치 않다.
김탁, <朝鮮前期의 傳統信仰: 衛護와 忌晨齎를 중심으로>, <<한국종교>> 6(1990).
1. 조선 초기 유교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르는 상제례를 전사회적으로 보급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죽음 의례는 쉽게 유교 의례로 대체되지 않았다.
(1)고려 공양왕 2년(1390) 입묘(立廟)와 제사를 주자가례에 의해 시행하도록 하는 법령이 제정되고, 그 실천을 위해 정몽주와 문익점은 가묘(家廟)를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조선조 들어 이러한 행정적 조처는 계속된다: “부모의 삼년상을 마치게 하고, 가묘(家廟)의 제도를 밝히며, 삼일장(三日葬)과 화장(火葬)을 금”하는 건의[태조실록 4년 6월 28일], “금년을 한정하여 모두 사당(祠堂)을 세우게 하고, 어기는 자는 헌사(憲司)에 이문(移文)하여 규리(糾理)하게 하소서”라는 건의[태종실록 13년 5월 10일].
(2)그러나 실제 의례 생활에서 이 규범이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지금 서인은 부모의 상이 백일(百日)을 미치지 못하니”[중종실록 8년 4월 14일], “근래 사대부(士大夫)가 구차스럽게 습속을 따라 관례는 전혀 거행하지 않고, 제례는 집집마다 각각 달라서”[중종실록 13년 7월 27일].
(3)심지어 16세기에도 상제례의 문란을 이야기하는 기사가 눈에 띈다: “지금 장사와 제사의 일을 음양(陰陽)·풍수(風水)와 무당이나 부처의 말에 구애받아서 하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단의 가르침에 빠져, 재상의 집에서도 몰래 수륙재(水陸齋)를 지내 뒷날의 복을 빌고 있으니”[명종실록 9년 9월 5일] “가묘(家廟)는 서둘러 짓지 않고 신주(神主)를 더러운 곳에다 모시면서 태연히 신(神)을 업신여깁니다.”[명종실록 10년 11월 1일] “변란이 발생한 이후 인륜이 멸절되어 상기(喪紀)가 폐추되었으므로 사대부(士大夫)들도 상제(喪制)가 무엇하는 일인지 모르는 것은 물론, 혹 종군(從軍)을 가탁하여 스스로 기복하는 자도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술마시고 고기 먹는 자까지도 있었으므로”[선조실록 26년 11월 13일].
2. 위호(衛護)는 무당에 조상 모심을 위탁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무교식으로 조상을 모시는 장소를 뜻하기도 하고 모시는 의례를 뜻하기도 했다. 이 용어는 14세기 말부터 15세기 말까지 약 100년간 기록에서 등장하는데, 이 기록을 통해 죽음 의례의 영역에서 무교와 유교가 공존, 혼합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위호에서 유교 상징물인 신주는 무교식 의례 행위를 통해 다루어진다.
(1)이능화는 위호를 조상을 모시는 신묘(神廟)라고 정의하며[“衛護(如高麗及李朝之祖先神廟也)”, <高句麗巫俗>, <<조선무속고>>] 조상굿의 연원으로 지목한다. <<고려사>>를 보면 원래 위호는 제의 공간을 포함하는 의미였다. “우리 나라에서 가묘(家廟) 법이 파괴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지금은 수도를 비롯하여 각 군현에 이르기까지 집이 있는 자들은 모두 다 반드시 사당(祠堂)을 세워 놓고 이것을 위호(衛護)라 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묘법의 잔재입니다.”[<<고려사>> 118권]
(2)조선조에 들어 무당의 집에 조상신을 맡기는 행위가 위호로 규정된다: “사대부의 집에서 조상의 신(神)을 무당[巫覡]의 집에 맡기고 신을 호위한다는 이름으로 혹 노비를 주되 4, 5명에 이른다고 하오며”[세종실록 13년 7월 13일] “사대부 집에서 이따금 조상의 신(神)을 호위(護衛)한다고 일컫고 무당의 집으로 신을 맞이하여 가고”[세종실록 13년 7월 17일] “조부모(祖父母)나 부모(父母)의 혼(魂)을 무당의 집으로 청해서 이름하기를 ‘위호(衛護)’라 하고, 혹은 형상(形象)을 그리고, 혹은 신(神)의 노비(奴婢)라고 칭하고서 무당의 집에 바치거나, 비록 노비는 바치지 아니하여도 혹은 위호(衛護)를 설치하고, 혹은 조부모(祖父母)의 신(神)을 무당 집에서 제사지내는 자가 퍽 많사오니”[세종실록 25년 8월 25일]
(3)이후 위호라는 명칭은 등장하지 않아도 그 풍습이 지속되고 있음은 확인 가능하다: “사노비(私奴婢)를 사사(寺社)와 무격(巫覡)에게 시납(施納)하는 자... 조부모(祖父母)·부모의 영혼을 무당의 집에 맞이하여 혹은 지전(紙錢)을 쓰거나 혹은 형상을 그리어 향사(享祀)를 배설(排設)하는 자” [성종실록 9년 1월 27일] “요즘 세상 사람들은 다투어가며 귀신을 신봉하여 무릇 길흉(吉凶) 화복(禍福)에 대하여 한결같이 무당의 말만 듣고서 화상(畫像)을 그려 돈을 걸어 놓기도 하고, 영혼(靈魂)을 맞이하여 집안에 들이기도 하며, 공창(空唱)을 듣기도 하고, 직접 성황(城隍)에 제사도 지내며, 노비(奴婢)를 시납(施納)하기도 하는데”[성종실록 9년 11월 30일].
3. 기신재(忌晨齎)는 왕의 기일(忌日)에 올리는 불사(佛事)를 말하는 것으로, 조선 초 왕실 죽음 의례에 불교적인 측면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신주를 불교식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혼합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신재에 대한 기록은 중종 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1)조선 초 불교와 왕실의 관계는 단절되지 않았고, 이는 유학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지금 사람들은 어버이가 죽으면, 크게 불공을 베풀고서 매양 죄 없는 부모를 죄가 있는 것처럼 부처와 시왕(十王)에게 고하고, 그 죄를 면하기를 비니 그 불효함이 이보다 큰 것이 없습니다... 밝고 지혜 있다고 이르는 자도 또한 속임과 꼬임에 미혹되어 죄를 두려워하고 복을 사모하여 수륙재(水陸齋)를 베풀고 친히 정례(頂禮)를 행하니”[세종실록 7년 1월 25일]
(2)기신재에 대한 언급은 세종 때 처음 나온다: “사람들이 불교에 감염된 지가 이미 오래 되어, 중에게 재 올리는 풍속이 아직 다 혁파되지 않았으므로, 기일에는 ‘승재(僧齋)’라 명칭하고는 다만 중에게 밥 먹이는 것이 급한 일인 줄 알고 사당의 제사는 돌보지 않으니... 원하건대, 지금부터는 기신(忌辰)에 재 올리는 일을 없애서 몸소 실천하는 뜻을 보이소서. 또 유사로 하여금 중에게 재 올리는 폐단을 일절 금지하고 가묘의 제사에만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백성의 풍속을 후하게 할 것입니다.”[세종실록 13년 12월 26일]
(3)기록들을 종합하여 기신재의 절차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저녁마다 중들이 세조대왕 및 정희 왕후의 혼을 부르는데, 높은 소리로 크게 외쳐”[중종실록 11년 2월 26일] ②“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신주(神主)를 먼저 욕실(浴室)에 보내어 목욕을 시킨 뒤에”[중종실록 10년 1월 23일] ③“판자(板子)로 신주를 만들어 백평상(白平床)이나 백의자(白椅子) 위에다 놓고 지전(紙錢)으로 사방을 모두 두르고”[중종실록 11년 3월 9일] ④“뭇 중들이 둘러 서 징과 북을 요란하게 두드리며 신주를 맞아 들이는데, 불상(佛像)은 위로 법당에 있고 신주는 아래로 방에 있게 되니”[중종실록 11년 3월 9일] ⑤“조종의 위판(位板)을 뜰 아래에 놓고 부처에게 절하는 예를 하였고”[중종실록 11년 2월 26일] ⑥“소문(疏文)에는 ‘부처를 받드는 제자 조선 국왕……’이라고 일컬으니”[중종실록 11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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