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ffery J. Kripal, The Serpent's Gift: Gnostic Reflection on the Study of Religion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7)
크리팔 교수의 책을 읽으면 찌릿찌릿하다. 그는 종교학이 종교의 핵심적인 부분인 지혜, 영지, 신비에 대하여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종교의 윤리적인 영역에 대한 발언이기도 하다. 나는 그가 비판하는, 종교에 대한 “순수하게 세속적인 연구자”에 속해 있다. 내가 속한 진영과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흐름은 분명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크리팔의 주장에 가슴이 떨리고, 그의 작업에 기대를 갖게 된다. 어쩌면 종교학의 소심함을 질타하는 데서 오는 이 찌릿함은, 엘리아데로부터 웬디 도니거를 거쳐 제프리 크리팔로 이어지는 그 무언가가 아닌가 싶다.
그가 가톨릭 교회 내의 동성애적 구조에 대해 이야기한 책(Road of Excess)을 출판한 직후, 공교롭게도 미국에서 가톨릭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이 터졌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터졌다. 부산의 가톨릭 보육시설에 있던 아이들이 “도깨비 신부님”이라고 불렀던 신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종교와 성의 문제는 학자라면 웬지 건드리기 꺼려지는 영역인 것이 사실이다.
그가 가톨릭 교회 내의 동성애적 구조에 대해 이야기한 책(Road of Excess)을 출판한 직후, 공교롭게도 미국에서 가톨릭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이 터졌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터졌다. 부산의 가톨릭 보육시설에 있던 아이들이 “도깨비 신부님”이라고 불렀던 신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집중적으로 이야기하는 종교와 성의 문제는 학자라면 웬지 건드리기 꺼려지는 영역인 것이 사실이다.
성직자의 성추행(abuse)과 관련된 보스턴 가톨릭 교회의 추문(醜聞)부터 지금 중동에서 일어나는 숱한 종교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것들이 근본적으로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리한 환상을 갖고 작업하는 일을, 학자들은 멈추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수많은 학자들이 상세하게 증명해보였듯이, 가톨릭의 동성애(homoeroticism)는 독신을 주장하고 동성애를 부정하는 한편 신비 전통과 신학 전통의 친밀한 차원을 갖고 있는 로마 가톨릭의 필연적인 구조이지, 신학교에서 게이를 금지하는 간단무식하고도 잔인한 어떤 방법을 통해서 교정될 수 있는, 역사의 스크린 위에 생긴 현대의 “삑사리blip”인 것이 아니다. 게다가 폭력, 심각한 비관용, 사회적 배제 등은 모두 일신교 자체의 역사와 신학에서 빠질 수 없는 것들이지, 남용되지만 않는다면 “평화로운 종교들”의 어떤 가상적인 “남용(abuse)”이 아닌 것들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종교들의 문제는 진짜 종교들의 문제(religious problem)이다. 우리가 이들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하고 전통 자체들과의 근원적인 대화를 통해서 종교적으로 그들의 종교적 토대를 능히 비판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이 문제들을 장기적이거나 가시적인 형태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신앙에 기반한 연구와 순수하게 세속적인 접근 둘 다 이 일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신앙에 기반한 연구는 너무나 전통의 전제들과 권위에 묶여있어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속적인 연구는 같은 것으로부터 너무나 떨어져 거리를 두고 있어서 어떠한 진정한 다름을 만들거나 어떤 지속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렇다면 종교학자를 몽매한 군중을 깨우치는 이로 설정할 수도 없으며, 또 신자들을 종교의 진리에 뭔가 가까이 있다는 특권을 지닌 이로 설정할 수도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지적으로 더 근본적이고도 종교적으로 더 참여적인(engaged) 무언가가 필요하다. 종교 전통의 사변적이고, 윤리적이고, 윤리적이고 예술적인 재능에 감사하면서도 종교 형태들의 잘못된 의식이나 거짓말에 대해서 비판적인, 일종의 근대적인 영지(gnosis)에 다가서는 무언가가 필요하다.(14)
전통적인 신학적인 연구에 머물러 있는 공감의 교실(classroom of sympathy), 근대 과학의 이성적 연구에만 매달려 있는 회의의 교실(classroom of doubt), 크리팔은 이 둘을 뛰어넘는 교실을 꿈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내가 속해 있는 곳은 두번째 회의의 교실이다.) 크리팔의 교실 이데아는 종교적 지혜와 날선 이성이 융합된 영지(靈知, gnosis)의 교실이다.
신앙으로부터 이성을 끌어내고 신앙과 이성을 융합하여, 어떠한 사회과학적, 순수 이성적 방법보다도 훨씬 근본적이고 잠재적으로 변혁적인 심층적 영지로 만들어낼 수 있는 많은 뛰어난 사람들이 있음을 잊지 말자.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는 공감(共感)의 교실과 회의(懷疑)의 교실과 나란히 세 번째 유형의 교실을 상상하고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 영지의 현현(gnostic epiphany)이라는 새 교실을 상상해야 할 것이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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