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세균의 존재가 알려져 있지 않아서 부패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빈 공기를 놔두면 생명이 저절로 생겨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과학사에서 이런 생명의 자연발생설이 폐기되는 것은 19세기 후반 들어서였다. (관련글: 생명의 기원) 그러니 옛날 사람들이 부패를 천지 창조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한 생각이 아니었다.
[치즈와 구더기]에 등장하는 16세기 이탈리아 농민 메노치오는 치즈가 부패하고 구더기가 들끓는 장면을 포착하여 천지 창조의 모델을 구성하였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모든 것이 혼돈이었습니다. 흙, 대기, 물, 불이 함께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고, 우유로부터 치즈가 만들어지듯이, 거기서 벌레들이 생겨났는데, 그 벌레들은 천사였습니다."
18세기에 우리나라의 안정복이 이와 매우 비슷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 역시 부패에서 세상의 시작을 상상하였다.
안정복은 서학(천주교)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성호 학파의 일원이다. 이익의 제자들 중에서 정약종, 정약용, 이벽 등이 서학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반면, 안정복은 서학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한다. (전자를 친서파 후자를 벽서파라고 부른다.) 안정복은 하느님의 천지 창조가 허랑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자연과학적 지식에 의거한 논변을 펼친다.
여기에 또 한 삼태기의 흙이 있는데 풀뿌리나 나무씨 하나 없고 벌레나 개미 한 마리 없이 두어 보자. 빈 막대기를 걸쳐놓은 위로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습기가 꽉 차면 역시 얼마 안 있어 하필 초목이 있고 벌레와 개미가 그 가운데에 생겨나는데 역시 기(氣)의 조화도 그런 것이 아닌가? 기가 만들어진 이후 그로 말미암아 형(刑)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무리가 점차 번성한다. 사람의 생겨남도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대지에서 백성을 이끈다는 것도 모두 아담 한 사람의 자손을 위한 것이니 과연 말이 되는가? 만약 그 설과 같다면 금수와 초목도 처음에는 단지 하나의 물건이 번식하여 생긴 것인데 이와 같은 설을 꼭 찾아낼 필요도 없고 또한 믿을 수도 없다.
(안정복, [천학문답]. 강세구의 번역. 장두희, “메노치오와 안정복과 정약종의 천지창조설,” [새 천년을 향한 가톨릭 지성의 좌표], 가톨릭 출판사, 2000, p.82.에서 재인용함)
버리려는 책에 이 논문이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이 대목만 옮겨 놓고 버렸다. 논문은 메노키오와 안정복의 언급이 비슷하다는 것에 착안해서 쓴 것이었는데, 비슷하다는 것 이상의 영양가 있는 분석은 결여되어 있다. 하지만 그 유사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재미있을 것 같아 이 대목만은 베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