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그것을 기술하는 언어,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이 평범한 명제는 종교학 이론에서 매우 핵심적인 대목이다. 일단 정진홍의 최근의 책의 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거시적인 안목으로 인류의 종교사를 조망하면 우리는 비교적 선명하게 ‘종교의 역사적 변천’을 기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종교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지 않은 채 ‘종교적’이었던 시대, 종교라는 것이 구분될 수 있는 문화로 등장하면서 각기 개개 종교들이 자신의 절대성을 당해 문화권 안에서 규범적인 것으로 발휘하던 ‘종교’의 시대, 문화권의 단절이 소통 가능하게 열려지면서 하나의 문화권 안에 여러 종교들이 공존할 수밖에 없게 된 ‘종교들’의 시대, 그리고 삶의 모든 양태들이 스스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면서 특별히 종교라는 전승된 문화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 자체를 ‘종교적’이라고 읽어야 비로소 삶의 모습이 묘사될 수 있는 ‘종교적인 것’의 시대로 진전되어 온 ‘흐름’이 그것입니다. (정진홍, [엘리아데-종교와 신화](살림, 2003), p.5.)
평이한 언어로 기술되어 있지만, 이 인용문에는 중요한 종교사적 변화와 그에 따른 방대한 이론적 논의들이 꽉꽉 압축되어 담겨 있다. 제일 처음의 원시적인 미분화의 단계를 건너뛰고 말한다면 세 개의 시대가 이야기되고 있다.
1. 단수로서의 종교의 시대는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종교 개념으로 서술되는 시대이다. 편의상 말한다면 하나의 종교가 한 문화권 내에서 통용되면서 절대적 진리로 이야기되는 시대이다. (여기서 편의상이라고 한 것은 종교 개념이 서구의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복잡한 논의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서양에서, 이슬람이 서남아시아에서, 유불선이 동아시아에서, 힌두교가 남아시아에서 진리로 이야기되는 것이 어색할 것이 없는 시대이다. 자기 종교의 절대성을 말하는 신학의 언어는 이러한 종교의 시대에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2. 그러나 요즘에는 자신의 진리만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낀다. 예를 들어, 어느 개신교인이 자기가 믿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열심히 말하고 나면 왠지 어색하다. 열나게 말해놓고 나니 누군가 "그럼 불교는?"이라고 묻는다. '젠장, 성서엔 불교에 대한 얘기 없는데...'라고 생각하며 "그건 인간의 가르침에 불과한거야"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그는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를 것이기에, 좀 켕기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종교들의 시대"에 살고 있다. 좋든 싫든 다른 진리를 믿는 사람들과 같이 살고 있으며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남의 종교는 틀린 것이라고 우기며 살아갈 수는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남의 종교들을 기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신학계에서는 "다원주의"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신학 논의들은 그럴듯하지만, 그 속내는 여런 진리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말할 수 있을까 논리를 다듬는 것이다.
종교학이라는 학문은 이러한 시대에 태동한 새로운 언어이다. 종교학의 초기 명칭이 "비교종교학"이라는 것에서 그 시대 배경이 잘 드러난다.
3. 최근에는 "종교들의 시대"의 언어들마저 부질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들에 대해서 이전처럼 진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사람들에게 종교가 삶의 핵심이긴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현대인들에게 종교는 없어도 그리 큰 일 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혹자는 종교의 무용을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현대인들은 이전 사람들이 종교에서 발견했던 희망과 꿈을 이젠 종교 아닌 다른 영역에서 발견하고 있다. 스포츠나 영화나 기타 레저와 같은 문화의 각 영역에서, 많은 이들이 삶의 의미를 구축해 나간다. 그 목록에 사이버 공간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 보면 종교라는 제도적인 틀을 넘어서 종교적 상상력이 사회 전반에 퍼지게 된 것이 현대 문화의 특성이다. 그래서 종교 아닌 것에서 종교적인 것을 찾는 이 시대를 "종교적인 것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종교학이 최근에 문화 비평으로 영역으로 확대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모색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조너선 스미스의 "종교, 종교들, 종교적인"(Religion, Religions, Religious)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있다. 정선생님은 평소에 이 글의 제목이 기가 막히다고 감탄해 하시곤 하셨다. 그 논문이 꼭 위에 말한 변화들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센스 있는 제목으로 최근의 중요한 변화를 세 단어로 압축한 스미스의 재주를 높이 보신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스미스의 제목을 이용하여 의미있는 변화들을 요령있게 서술해 놓은 것이다.
이처럼 종교 문화가 급변하면 그것을 서술하는 언어들도 뒤따라 변화해야 한다. 우리 현실에서는 이전의 현실을 묘사하던 용어와 새로운 용어들이 혼재하여 혼선을 일으키고 있다. 사실 우리 사회에는 종교의 시대를 사는 사람, 종교들의 시대를 사는 사람, 종교적인 것들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공존하며 서로 다른 의미 맥락의 언어들을 내밷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를 서술하는 언어는 아직 혼란스러울수밖에 없다.
‘종교’의 시대에 종교를 묘사하고 설명하는데 적합하던 어휘나 문법들이 ‘종교들’의 시대나 문법들이 ‘종교들’의 시대나 문화, 또는 ‘종교적인 것’의 시대나 문화에서도 여전히 종교를 서술하고 논의하는데 적합성을 가질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그러한 ‘종교’시대의 종교이해가 ‘종교들’의 시대에 종교를 설명하는 데서 직면하는 한계를 현실적으로 절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봉헌한 종교만이 종교일 뿐 다른 종교는 ‘그릇된 종교’이거나 ‘종교가 아닌데 종교라고 잘못 불린 종교’라는 종교이해의 한계가 그것입니다.(정진홍, [엘리아데-종교와 신화](살림, 2000), p.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