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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문화

개신교 초기 장례에 대한 신문자료

by 방가房家 2007. 6. 22.
  “강형댁여집씨 별세한 일”, 『대한크리스도인 회보』, 1898.11.30

초기 개신교인의 장례 모습을 보여주는 기사이다. 강여집씨는 개신교 의료의 혜택을 받은 이로, 신실한 신자로 지내다가 "천당간다"는 기쁨을 표현하고 죽었다. 비록 오래 지속되지는 않지만 당시 개신교가 죽음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일으켰음을 보여준다. 장례식에는 기도와 찬송이 부가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인천 교우 강여집씨는 봉교한지 육 년이오 나이는 사십 칠세라. 육년 전에 신병이 있어 정동 시병원으로 병 고치러 갔다가 하나님 지덕과 구주지은으로 병이 나음을 문득 깨닫고 생각하되 내가 육신의 병뿐 아니라 영혼의 병이 더욱 심히 크게 들었으니 하나님께 빌어 내 영혼의 병을 고쳐 주옵시기를 간절히 빌고 그때부터 회개하고 주를 밤낮 생각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듯 어린 아이가 젖을 생각하듯 주를 일시도 잊지 아니 하더니 작년 십일월부터 우연히 병이 들어 점점 병세가 중하기로 외국 의사들이 병을 보되 조금도 낫지 아니 하더니 금년 유월에 상동 병원에 가서 수개월 병을 보는데 다행히 조금 낫더니, 집으로 내려와서는 점점 병세가 중하여 금월 십육일에 세상을 떠나되 즐거운 마음뿐이오 또 삼 일전 하는 말이 “내가 주를 따라 가겠으니 목욕 시키라” 하여 목욕하고 새 옷을 내여 입고 요에 누워 하는 말이 “회당에 한번 다시 못가오니 섭섭하오나 천당으로 가니 마음은 매우 기쁘다” 하고 마침 목사께서는 상경하셔서 보지 못한다 하고 십육일 하오 사점종에 그 집안 식구가 잠깐 누었는데 기도하는 말이 “주여 주여 어서 저를 데려 가옵소서” 하는 소리를 듣고 촛불을 밝히고 자세히 보니 얼굴에 화색이 나며 기운이 쇠진 하거늘 교중 형제자매가 말을 물어보니 분명히 “주를 따라가오” 하니 답이 평생 소원이로다 하고 세상을 떠났는데 우리 보기에 천당 가는 증거가 분명한지라. 교우가 다가가서 찬미와 기도하고 상여를 새로 사백 사십일 하오 아홉시에 예배당에 들어와 예를 베풀고 상여를 교우들이 메고 대로 상으로 가는데 목사와 교중 유사들이 성경을 들고 앞에서 절차 있게 나가고 뒤에는 여러 교우들이 나가고 뒤에는 여러 교우와 학당 아이 수십 명과 부인네들도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같이 산에까지 가서 목사가 예를 베풀고 남녀 교우 팔십 여원이 찬미하여 천당 가는 영혼을 위로 하였더라.




“고씨부인 별세한일”, 『대한크리스도인 회보』, 2-52, 1898.1.26

이 자료에는 장례식에 어떠 기독교적 요소가 첨가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장례에 참가하는 이들이 십자건을 쓰고, 여성의 경우 십자가를 수놓은 저고리를 입었으며, 묘 앞에 십자패를 세웠다. 기존의 장례에 기독교 상징을 첨가하는 방식으로 개신교 장례가 형성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강화 홍해 교회 고씨부인은 금년에 연세가 칠십 일이요 봉교한지 이년 동안에 주의 은혜를 많이 받은 것이 이전에는 귀가 어두워 말을 분명히 듣지 못 하더니 주를 믿은 후로 귀가 열리고 복음 뜻을 재미있게 들으며 본 교회 회당 짓는데 진심 갈력하여 보조도 많이 하고 믿는 행적을 많이 나타내어 남의 신심을 도와주며 진심으로 주를 경외하더니 금월 구일에 위연 들병하여 십일일 오후 육점에 별세하니 자녀 제손들이 조금도 슬픔이 없고 생시에 좋아하시던 찬미로 천당가는 영혼을 위로하며 본 교우들이 제제히 복을 입었는데 구주의 구속하신 십자가로 형제됨은 표하려고 십자건(十字巾)을 쓰고 부인들은 짓무명 저고리에 십자를 놓아 입었더라. 십사일에 장례를 지내는데 본처 교우와 교항동 교우와 고비 교우들이 다 모이고 인천 목사 도원시씨가 가서 장례를 행하려 하셨더니 본 교회 소관사가 있어 못가고 본처 전도인 김기범씨와 담방리 교회속장 전주사 복정채씨로 대송하여 교중례로 선산에 안장하고 묘전에 십자패를 세웠으니 생시에도 주의 십자가를 자랑하시더니 사후에 육체까지라도 모든 분묘 중에 기독도됨을 표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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