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의례문화/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수용에 관한 글에 부가할 자료들

by 방가房家 2023. 4. 16.

8월달에 한 기독교단체 행사에서 “한국의 크리스마스 수용”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블로그에 있는 같은 제목의 글, <한국의 크리스마스 수용>의 자료를 바탕으로 글이 되도록 새로 구성한 글로 내용상 새로운 점이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블로그에 올리지는 않았다.


요즘 접한 자료 중에서 미리 알았다면 그 글에 넣었으면 좋았겠다 싶은 것들이 눈에 들어와 여기 첨가해 놓는다.
1. 글의 “2-2. 선교사들의 크리스마스와 선교지의 크리스마스”는 한국에 처음 들어왔던 개신교 선교사들이 그들 나름의 미국식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모습과, 그들의 크리스마스와는 달리 선교사 상황에서 요구된 크리스마스의 모습을 대조하는 부분이다. 선교사들이 처음에 본국의 관행에 충실한 그들끼리의 크리스마스를 즐기던(그리고 그것은 한국 교회에서 누려지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로 전라남도 지역에서 초기에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서한의 한 부분을 보았다.
다음은 송현강, “목포 스테이션의 설치와 운영”,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발표회(2008.9.6)에서 재인용한 내용이다.

1897년 12월 목포에서 스테이션 부지 매입 계약을 마친 벨은 다시 가족이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성탄절을 지내기 위함이었다. 부인 로티(Lottie)는 벨에게 큰 거울, 손수건, 털모자, 캔디 1상자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고, 남편 벨은 액자 하나와 15불을 선물했다. 아들 헨리의 양말에는 사탕, 땅콩, 오렌지, 건포도, 공, 인형을 넣어 두었다. 로티가 준비한 그날 저녁 메뉴는 스프, 야생거위, 샐러드, 감자, 땅콩과 건포도가 들어있는 초코아이스크림, 초코케이크, 과일케이크, 일본산 오렌지, 캐러멜, 초코캔디였다. (E. Bell, Letter to Sister, 1897. 12. 27)


2. 글의 “4-3. 20세기 초 한국 교인들이 받은 크리스마스 상자”는 상업적인 크리스마스 선물이 유행하기 전, 교회 안에서 주어지던 선물은 선교 본국으로부터 한국 교인들에게 구호물자처럼 주어지던 호혜적 성격의 것이라는 내용이다. 아래의 내용은 선교사가 쓴 소설의 일부이다. 소설이지만 그의 선교 경험을 재기술한 내용으로 1900년대 초의 교인과 선교사의 관계, 교인이 생각한 크리스마스 선물, 크리스마스 선물에 의해 형상화된 본국의 이미지가 잘 드러난 자료라고 생각된다.
소녀가 물었다. “선교사님은 곧 본국으로 돌아가시나요?”
“그래 일주일 후에.”
“크리스마스 장식과 우리 모두에게 선물을 보내주신 분들, 선교사님 친구 분들을 만나게 되나요?”
“그럼. 그들에게 무사히 돌아가도록 하느님이 지켜주신다면.” 선교사는 대답했다.
“그렇다면”하고 잠시 머뭇거린 다음 “그냥, 옥분이가 감사하다는 말을 하더라고 전해주시겠어요?”
미네르마 구타펠, 이형식 옮김, <조선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 <<조선의 소녀 옥분이: 선교사 구타펠이 만난 아름다운 영혼들>>(살림, 2008), 16-17.


구타펠의 이 소설집에는 <조선의 왕자에 지나지 않아>라는 소설도 있다. 한 조선의 왕자(누구를 모델로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가 궁전에 접해있는 선교사택에 가서 선교사 부인에게 크리스마스에 대해 알려달라고 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다. 앞의 “2-2. 선교사들의 크리스마스와 선교지의 크리스마스”의 선교지의 크리스마스의 상황, 특히 스크랜튼 부인이 민비를 집으로 초대해 크리스마스의 유래를 알려주었다는 에피소드와도 오버랩되는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