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lmore, George W., <<Korea from its Capital>> (Philadelphia: 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and Sabbath-School Work, 1892), ch. 10(185-198).
선교 초기에 잠시(1886-89) 머물렀던 선교사 길모어의 책 중 종교에 관한 10장을 부분적으로 번역한 것. 그에 대해는 아래 내용을 참조. 그의 저서로 나온 것으로는 <<Corea of Today>>(London: T. Nelson and Sons, 1894)가 또 있는 데 이것은 1892년에 나온 위의 책을 축약해서 다시 출판한 것으로 내용상의 변화는 없다.
(인물 소개)
길모어[Gilmore, George William 1857-?] 교육자. 육영공원(育英公院 ; Royal English School)교사, 한국명 길모(吉毛). 런던에서 출생. 미국 프린스턴대학을 마치고 유니언 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866년 한국의 왕립근대교육 기관으로 설립된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되어 내한했다. 89년까지 봉직하였고 근대 교육제도 확립에 공로를 남겼다. 귀국 후 《Korea form its Capital》(1892, 필라델피아)을 저술한 바 있다.
제10장 종교
한국에서의 종교는 중국에서처럼 고도의 성장에 이른 것도 아니고 일본에서처럼 화려함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일본에서는 예술과 자연 덕분에 종교의 향기가 깊어졌다. 절과 사원들은 예술가와 기술자의 봉헌과 부자의 재산을 흡수하였다. 그 결과 일본에 가는 관광객들은 미(美)의 집약이자 구현인 사원들을 방문하게 된다. 사람들은 단체로서 개인적으로도 늘 그곳에 간다. 관광객들은 방랑자가 멈춰서서 보물 안으로 돈을 집어넣는 것, 종을 울리고 박수를 쳐서 명상 중이던 신의 주의를 끄는 것, 그리고 기도문을 외는 것을 익숙하게 보게 된다. 상인은 짐을 옆에 놓고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한다. 직공은 일하러 가다가 멈춰 기도문을 왼다. 많은 사제들이 기도를 찬송하며 징을 울려 음색을 변화시키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맹인과 병자는 나무와 돌로 된 신들에게 자신의 고통스러움을 갖고 와서, 신도 사원 내에 신들에 종잇조각을 바친다. 모든 곳에서 사람들의 종교 생활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원과 참배객들은 사방에 넘쳐나고, 집에는 고대 로마처럼 가족 사당이 있다.
중국에서 종교는 화석화되었다. 목재가 규산화 과정을 거쳐 무거워지고 차가워져서 딱딱해진 나머지 밑에 깔린 물질 위로 가라앉는 것처럼, 중국의 종교는 종교 규범들이 삶의 공식이 될 정도로 경화되고 무거워졌다. 중국인의 종교적 믿음은 그들의 보수주의의 보루이다. 당신은 가정 환경에서는 중국인과 차이점을 조화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은 사회와 정치 경제학에서는 서양의 연구 결과를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진전이 종교 생활에 접촉하게 되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게 된다. 종교는 명시적이지 않으나 강력하고 굽힘이 없다.
한국에서는 전혀 다른 양상을 만나게 된다. 사원은 매우 적은 수만 있으며 화려함의 요소가 부족하다. 사원은 이 나라의 빈곤함을 반영한다. 봉헌하는 등의 행렬, 칠한 사치품과 장식한 재산과 선물들이 줄지어 있는 국가 지정의 참배 장소가 없는 것이 두드러진 특성이다. 그러므로 일본에서 볼 수 있는 조건은 결여되어 있다. 한국에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보수주의와 종교적 변화에 대한 강렬한 반대를 확증해줄만한 십년 동안 지속된 광범위한 결사도 만날 수 없다. 한반도에는 지난 육년간 개신교 선교사들이 순조롭게 활동을 개시했다. 중국과 일본에는 각각 세 형태의 종교들이 있는 반면에, 한국에는 오직 두 형태, 불교와 유교만이 발견된다. 물론 이 두 종교는 모두 중국으로부터 소개된 것이다.
한반도의 언어와 문헌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에 따르면, 한국의 지배적인 종교로는 유교가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것이 사실이다. 하층 농부부터 왕에 이르기까지 유교는 모두에 의해 실천된다. 그러나 자연스럽게도 상위 계층은 중국 고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에 기독교 도입에 대해서 가장 강한 반대가 있었고, 모든 쇄신에 대해 가장 저항했던 사람들이었다. 위패 앞과 묘소 앞의 조상 숭배는 모두가 따르는 실천이다. 이 숭배는 마지못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관료들과 농부들에게, 왜 일 년 중 어느 날 조상의 위패나 묘소에 가서 제물을 올리는지 물어보았다. 그것은 조상들이 해를 입힐 힘을 갖고 있는 것을 두려워해서인지, 그들의 능동적인 힘에 탄원하여 이 세상사에 관여해주기를 원해서인지를 물어본 것이다.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아니오. 우리는 나쁜 일을 우려하는 것도, 좋은 일을 기대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법이고, 관습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에게 종교는 의지를 움직이고 감정을 조절하고 삶을 형성하는 능동적인 힘이 아닌 것이다. 그와 반대로 한국 종교는 노쇠한 중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세월을 존중하는 관습의 당연한 귀결이다. 물론 유교 윤리는 이 나라를 지배한다. 유교의 최상의 가치인 효도 공경은 중국 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반도에서도 두드러지는 것 같다. 젊은 사람은 사회적 위치에 상관없이 어른의 말을 공경해야 한다. 유교는 국가 관계를 형성하였고, 가뭄과 역병의 시기에는 왕은 하늘의 주인께 역병을 물리쳐달라고 탄원한다.
이 나라 전역에는 지난날 광범위했던 부처님 숭배의 흔적들이 있다. 현재에는 금기시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불교 따르지 않는다. 사실 몇몇 성의 수문장들은 불교 승려들이다. 그들은 노역의 대가로 왕의 국가 자원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길 여기저기에 존재하는 작은 사원을 관리하는 승려들은 그런 혜택을 받지 못하지만, 백성들에게 동냥을 하는데 확실히 배를 곯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몸을 절단한다든지 해하는 일은 없다. 삭발하는 것 외에는 승려들에서 불쾌감을 주는 부분은 없다. 그러나 백성들의 눈에 불교의 지위는 승려들이 도성에 출입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고착화되어 있다. 성 안에 있는 것이 발각되면 죽임을 당한다. 그 결과 도성 내부에는 사원이 없다. 유교 의례가 거행되는 조상 위패(를 모신 곳)은 있지만, 절은 북서쪽 구석의 “하늘의 절”말고는 한 곳도 없다. 그곳은 낮은 담으로 둘러싸이고 자갈이 깔린 개방된 공간에 불과하다.(189)
[위의 사진은 불교 관련 서술 내용에서 사용된 도상. 흔히 서울 흥은동 옥천암에 있는 "보도각 백불"이다.]
(190)
한국인들의 진정한 예배는 조상 위패 앞과 묘소 앞에서 이루어진다. 이 예배의 특성은 단순하다. 작은 상에 밥과 다양한 양념으로 제물을 차리고 그 앞에서 엎드려 절하고 기도를 드리는 것이 전부이다. 신(spirit)이 참석해서 차려진 선물을 함께 먹는다고 믿어진다. 이 의식은, 이것을 의미 없다고 흔히 생각하는 농민들보다는 상위 계층에 더 밀착되어 있다. 식자층으로서 유교 경전을 읽었기 때문에, 이들 상위 계층은 책에서 유교의 탁월한 힘에 대한 확신을 얻고 유교를 지지하고 다른 형태의 숭배를 반대해야 할 절박한 이유를 찾아낸다. 이 의식은 그들에게 존경과 정통성을 보증해주고 그들 지위의 영속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두 종교 외에도 두드러지게 종교적인 형태가 있으니, 그것은 다른 힘과 다양한 개성을 지닌 수많은 정령들과 데몬들에 대한 믿음이다. 도성, 궁궐, 사원, 그리고 많은 집들의 입구는 가장자리와 구석에 새, 원숭이, 찡그린 표정의 사람의 기괴한 모양이 있는 기와로 덮여있다. 이것들은 도시에 들어와 안정을 해치고 번영을 막는 악한 정령과 데몬들에 겁을 주어 물리치기 위한 것들이다. 콜레라가 유행하던 1886년에 나는 길을 가다가 콜레라 악귀가 거리에 들어와 사람들에 병을 옮기지 못하게 하는 주문을 담은 종잇조각이나 천조각이 입구의 좁은 길에 실로 매달려 늘어져 있는 것을 자주 보곤 했다. 동일한 악한 존재를 겁주어 쫓거나 달래기 위해 담장 밖에서 불을 태우기도 한다. 여행자들은 어떤 길을 지나다니든 나무에 색동천이나 종잇조각으로 장식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론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작은 돌들이 규칙적이지 않게 쌓여 있기도 하다. 그 나무들은 정령이나 수호신이 머무는 곳이라고 하며, 때론 여행객이 여행에서 부정을 치워달라고 하면서 돌을 올려놓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하다.(191)
(194)
귀신 접신(demonical possession)에 대한 믿음은 매우 일반적이다. 이 믿음은 접신에 의해 이득을 얻는 사람들에 의해 길러진다. 축귀사와 마법사(conjurer)는 일반적인 병을 구실삼아 환자의 몸에 거하는 정령을 쫓아낸다며 그들의 능력을 사용한다. 이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북소리를 듣고 쫓아가보면 어느 집 주변에 결과를 궁금해 하며 기다리고 있는 군중들을 보게 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물어보면, 악귀가 집에 들어가서 집안사람 하나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자연이 쇠해서 죽음이 찾아오든지 자연이 회복되어 환자가 건강을 되찾을때까지, 일주일이 되기도 하는 그 기간 동안 밤낮으로 북소리가 쉬지 않고 이어진다.
선하거나 악한 정령들, 사악하거나 온화한 정령들, 친절하거나 악의적인 영(fairy)들이 언덕과 골짜기에, 바위 구석과 틈에, 나무 밑동이나 숨겨진 굴 속에 가득하다. 삶의 어던 일도 그들의 간섭에 지배받는다. 운은 한국인의 경제생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다양한 질병에 대한 구체적 이유들이 수없이 많은데, 어떤 것은 영과 정령의 돌봄에 의해, 어떤 것은 영과 정령의 악의에 의해 생긴다. 아이들은 무서워 착한 일을 하고 어른들은 밤에 나타난다는 정령 이야기에 집에 머문다. 새들이 찾아오는 것은 길조(吉兆, omen)이며, 밤의 뒤숭숭한 꿈은 흉조(凶兆, portent)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거의 모든 우연한 사건에서 미래에 대한 의미를 찾는다.……(195)
(198)
이들 미신의 대부분은 실질적으로 종교와 상관이 없지만, 미신에 대한 믿음이 이처럼 광범위하다는 사실은 선교사들이 가장 큰 저항에 부딪히는 그 경향성을 지시해준다. 미신이 지속되는 완강함은 역행하는 힘을 보여준다. 특히 한국의 귀신숭배(demonology)는 성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필자는 이 영역 연구가 주목받지 못해서 이른 시일 내에 이 주제에 곧 정통하게 될 수 없음이 아쉽다. 데몬에 대한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믿음으로 인해서, 기독교 개종교자들은 분명 힘든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 특별한 경향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어서 흥미로운 동시에 도움이 되고 실용적인 지식을 제공하였으면 한다. 지금 이 나라에 머물고 있는 선교사와 같이 훌륭한 기회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 연구가 추진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