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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문화/크리스마스

초기 한국 크리스마스의 모습

by 방가房家 2009. 1. 20.

아랫글에 이어 다시 논문 우려먹기. 초기 한국 개신교인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어떤 날이었는지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크리스마스를 묘사한 옛 자료들을 뒤지면서 나름대로 두 특성을 잡아내었는데, 해놓고 보니 지금 볼 수 있는 모습과 별반 다를 게 없어 좀 허탈했다...

하나는 크리스마스가 비신자에게 기독교를 소개하는 酉?구실을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크리스마스가 수혜의 이미지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 어릴 적을 생각해보면, 기독교인 친구들은 비신자인 내게 크리스마스 전날 연극 구경을 오라고 많이 초대하곤 했다. 그날 교회 가면 연극 보고, 사탕 먹고, 운 좋으면 선물도 받을 수 있었다. 내게 크리스마스는 그런 날이었다. 그런 내 어릴적 모습이 공교롭게 아래 내용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자료 보고 분석한 내용이 맞나 싶을 정도로, '성탄 교인'이었던 내 경험이 투사되어 있다...


이렇게 정착한 크리스마스는 한국적 맥락에서 몇 가지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만나는 연결 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크리스마스는 한국에서 이국적 풍습으로 출발하였고, 그래서 비기독교인들이 호기심을 갖고 기독교를 구경하는 날이 되었다. 초기에 선교사들은 크리스마스의 이국성을 통해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전도하였다.(1) 그런데 그것은 초기의 상황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이후 한국 크리스마스의 특성으로 자리한다. 교회에 외부인들을 불러 기독교를 소개하는 일은 매해 반복되었고, 그 반복을 통해 크리스마스는 신자의 입장에서는 ‘전도하는 날’, 비신자의 입장에서는 ‘구경 가는 날’이라는 의미화가 이루어졌다. 초기 기록에서부터 크리스마스 행사에 기독교인이 아닌 마을 사람들도 모여들어 구경한 모습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근처 여러 동네 사람들이 남녀노소 없이 구경하여 회당문이 다 상하도록 들어오는”(2) 광경이 교회마다 연출되었다. 상당수의 지역에서는 교인보다도 많은 숫자의 구경꾼들이 와서 교회를 가득 채우기도 하였다.(3) 평소에는 교회에 들어가지 않던 비신자들도 크리스마스 때만은 교회에 들어가 행사를 구경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의 크리스마스는 평소에는 지역 사회와 격리되어 있던 교회의 신앙공동체와 지역 주민들 사이에 물꼬가 트이는 날이 되었다. 1935년에 선교 잡지(The Korea Mission Field)는 다음과 같이 크리스마스가 한국에 정착했다는 진단을 내린다.(4)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이후 18세기 동안 한국에는 크리스마스가 없었다. …… (그러나 이제) 모든 도시와 골짜기의 기독교회와 더불어, 크리스마스는 비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조차 일년 중 가장 잘 알려진 날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은 한국적인 것이고 서구에서 즐기는 크리스마스에는 낯선 특징들이 있다.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 기독교 교회는 비기독교인 공동체에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자리매김은 현재까지도 어느 정도 남아있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기간은 전도 주간으로 설정되고, 그 행사에는 주변 사람들이 신앙에 상관없이 초청 받아 참석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전승되고 있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는 개신교 공동체 외부와 개신교인들을 매개하는 지점으로 작용한다. 개신교 실천 체계 중에서 유일하게 비기독교인에게도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크리스마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른 실천들이 개신교 공동체를 다른 집단과 구별해주고 배타적인 태도를 강화하는 쪽으로 작용했던데 반해서, 크리스마스는 다른 집단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쪽으로 작용하였다. 그러기에 개신교인 공동체 내부의 의미화와는 별도로, 한국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 크리스마스는 의미화될 수 있는 실천이 되었다.

크리스마스가 한국 사회에서 갖는 두 번째 의미는 ‘선물 받는 날’이라는 의미이다. 이 점 역시 초기에 규정된 의미가 전승을 통해서 확립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현재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가족 관계나 교우 관계를 중심으로 교환이 이루어지지만, 초기 한국 개신교의 실천은 다른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이 때의 선물은 교회가 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선교 본국으로부터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보내지는 선물이 당시의 대표적인 선물이었다.
크리스마스 상자(Christmas Box)라고 불린 꾸러미가 매년 미국으로부터 한국으로 전송되었다.(5) 거기엔 아이들에게 주기 위한 학용품, 사탕, 과자, 건과 등이 들어있었다.(6) 매우 간단한 선물이었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귀한 것으로 인식되었음이 틀림없다. 물 건너온 선물이 한국인 아이들에 배포되었던 크리스마스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날로 자리매김하였다. 크리스마스 수주일 전부터 열리는 주일학교는 이 선물과 관계가 있었다. 주일학교에서 성경을 암송하게 하여 그 상으로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암기왕을 선발하여 상을 수여하기도 하였다.(7) 그리하여 크리스마스 몇 주 전에는 주일학교 학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8) 이러한 주일학교 풍경은 현재의 교회에도 많이 남아있다.

크리스마스는 교회가 수혜적 이미지를 갖도록 하는데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9) 이 이미지는 교회가 일반 교인과 갖는 관계에서도 나타난다.(10) 이처럼 교회에서 선물을, 그것도 선교 본국으로부터 온 선물을 베풀었다는 점을 감안해볼 때, 한국에서 산타클로스라는 낯선 신격의 역할을 처음으로 수행한 것이 선교사들이었다는 점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11) 이국적인 풍광을 통해 획득된 이국의 선물, 크리스마스가 주는 풍요로움, 그것도 먼 곳으로부터 오는 풍요로움이라는 이미지는 산타클로스 상징과 결합하여 초기부터의 반복적 실천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1) 1893년의 노블 부인의 일기에 그러한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며칠 전에 나는 우리 어학 선생에게 이웃의 부인들을 오후에 초대하는 글을 써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이 날은 우리의 큰 명절이기 때문이다. ……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우리의 축복받은 크리스마스에 대해서 알지 못하며 예수에 대해서 들어보지도 못했다. 오늘은 그들에게 예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Noble, Wilcox, “1893년 12월 25일 일기”, The Journals of Mattie Wilcox Noble 1892-1934,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3, p.36.) 그리고 1894년에 민비에게 크리스마스를 소개했다는 스크랜튼 부인의 기록도 비슷한 맥락을 지닌다: “크리스마스 전날, 왕비는 나를 불러 우리의 성대한 축제와 그 기원, 의미, 그리고 어떻게 거행하는지에 대해 얘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보다 더 명백한 인도의 기회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그녀에게 천사의 노래, 별, 그리고 구유에 누워있는 작은 아기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버려진 세상의 구속됨,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세상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온 구세주에 대해 설명하였다” (L. H. Underwood, 신복룡·최수근 역주, 『상투의 나라』, 집문당, 1999, p.147.)

2) “1899년 1월 4일 기사”, 『대한크리스도인회보』.

3) 1900년에 인천 담방리 교회에는 교우 50여명에 구경하는 사람들 수백명이 있었으며 구경꾼 중 30여명이 같이 예배를 보았다. 인천 항우동 교회에는 교인 200여명에 구경꾼 300여명이 행사에 참여하였으며 이 중 50여명이 예배를 보았다. (“예수탄일경축”, 『신학월보』 1호 2권, 1901.1, pp.79-80.)

4) “Christmas in Korea", KMF 31-12, 1935, p.245.

5) 공통적인 용법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역사적으로 크리스마스 상자(Christmas box)는 크리스마스 선물(Christmas gift)보다 초기의 형태이다. 크리스마스 상자는 지주가 크리스마스 때 하인이나 고용인들에게 베풀었던 물질적 보상에서 유래한다. 그러한 농촌의 관행이 17세기 영국에서 도시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 크리스마스 상자였다. 18세기 말부터 크리스마스 상자는 점차 선물로 변하기 시작한다. 수혜의 공간이 사회에서 가정으로, 수혜의 대상이 하층 계급에서 어린이로 축소 변모되는 과정을 통해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었고 그것은 개인적인 수여의 성격을 띠게 된다.(Nissenbaum, Stephen, 앞의 책, p.110.) 선교 초기에 한국인에게 부여된 선물은, 집합적 대상의 성격을 지니며 음식물과 같은 소비재가 주를 이루기 때문에, 그것에 마스 상자’라는 명칭이 적용된 것은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식으로 말해서, 1세기 전 서구에서 하층민이라는 사회내의 타자에게 부여되었던 크리스마스 상자는, 19세기 말에는 한국인이라는 외부적 타자에게 수여된 셈이다.

6) Mattie Wilcox Noble, "How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observes Christmas in Korea", KMF 15-12, 1919, p.257.

7) 어느 해에는 두 소녀가 일년 내에 5000구절을 암송하여 상을 받기도 하였다. (Mattie Wilcox Noble, "How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observes Christmas in Korea", KMF 15-12, 1919, p.257.)

8) “Christmas in Korea", KMF 31-12, 1935, p.245.

9) 교회의 수혜적 이미지는 해방 후 구호물자로 인해 더욱 강화된다. (이서구, 『세시기』, 박영사, 1969, pp.166-167.)

10) 해방 이후의 일이긴 하지만, 성탄 때만 교회를 찾는 사람이라는 뜻의 ‘성탄 교인’이라는 말이 생겼다는 사실과, 그러한 사람을 풍자하는 다음의 유행가는 크리스마스가 일반인들에게 갖는 의미를 잘 말해준다: “오늘 예수 첨 믿는 날 / 좋은 선물 받았네 / 다음 성탄 또 와서 / 더 좋은 것 받겠네” (이서구, 앞의 책, pp.177-178.)

11) 1901년에 블레어 선교사가 산타로 분장하여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사무엘 마펫, “1901년 12월 25일 편지”, 『마포삼열 목사의 선교 편지(1890-1904)』, pp.680-681.) 그 이후에도 선교사가 산타로 분장하는 것은 흔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맥쿤 박사가 산타로 분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Mrs. Harold Voelkel, "Christmas Memories of a Missionary Home", KMF 31-1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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