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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문화/크리스마스

한국에 크리스마스가 들어왔을 때

by 방가房家 2009. 1. 20.
크리스마스와 별 인연이 없으면서도, 난 크리스마스에 관심이 많았다. 무슨 관심이냐면, 이 낯선 날이 어떻게 한국 땅에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되었는가를 알고 싶었다. 옛날에 쓴 논문에 이런 관심의 흔적이 있다. 크리스마스 수용이라는 문제를 놓고 나름대로 자료 찾고 짱구도 굴리고 했더랬다. 논문 중에서 크리스마스에 대한 부분은 내가 직접 찾은 자료로부터 구성한, 몇 안 되는(!) 부분 중 하나이다. 남의 연구에서 열심히 빌어다 쓴 다른 부분에 비해 설익었으면서도 애정이 가는 그런 부분이기도 하다. 고칠 엄灌?전혀 안 나고, 좀 유의미하다 싶은 부분을 그저 조금 잘라 여기다 실어놓는다.

아래 내용은 한국에 크리스마스가 처음 들어왔던 1800년대 후반의 과정을 조사한 것이다. 추수감사절 수용 조사할 때보다 좀더 뺑이쳐서 조사한 내용이다. 여기서 내가 나름대로 주장한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크리스마스가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되긴 했어도, 정말 중요한 부분은 한국인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수용되었다는 것이고 그랬기 때문에 짧은 시기에 폭발적으로 수용되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1897-9년의 3-4년 동안에 크리스마스가 갑자기 우리나라에 자리잡았다는 것. (여기 빠진 내용이 있다. 개신교보다 백년 먼저 들어온 천주교 자료가 검토되지 않은 것. 하지만 개항 이전에는 한국인이 크리스마스를 누릴 여건은 못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개신교 선교가 개시된 1884년부터 선교사들에 의해 누려졌으며(1),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인 신자들과 크리스마스를 지내게 된 것은 1887년부터였다. 선교사 언더우드는 세례를 베푼 한국인들을 1887년 크리스마스 때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처음으로 성례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인이 누린 최초의 크리스마스일 것으로 생각된다.(2) 언더우드는 첫 성례 참여라는데 의미를 두어 성례 날짜를 크리스마스로 잡은 것으로, 기념적인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크리스마스 자체를 지낸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은 크리스마스에 그리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청교도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으며(3), 미국의 청교도는 크리스마스를 이교도의 풍습으로 보아 한 때 그것을 폐지했을 정도로 크리스마스에 적대적이었다는 점(4)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상대적인 무관심은 이해할 만한 것이다. 선교가 어느 정도 진척된 1890년대 중반에도 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기 보다는 휴가로서의 의미가 강하였다. 즉, 선교사로서 한국 신자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지내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가족들과 선물을 교환하거나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생각하였다. 크리스마스 날 선교 임지를 떠나 가족이 있는 곳으로 왔다는 기록(5)이나 안식년 휴가를 크리스마스에 맞추어 떠나는 것(6)에서 그러한 생각이 드러난다. 이러한 내용은 선교사들이 사명감이 약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그들의 신학적 경향이 표출된 것일 뿐이다.
선교사들의 상대적 무관심과는 달리, 한국인들은 18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자신들에게 의미있는 날로 정착시켜 나가기 시작한다. 이 당시에 발간된 신문들을 참고하면 이 시기에 크리스마스가 급속히 확산되었음을 볼 수 있다. 1896년에는 크리스마스가 소개되는 정도이다.(7) 그러나 1897년에는 배재학당에서 크리스마스 행사가 있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8) 그 해 창간된 최초의 기독교계 신문 『대한크리스도인회보』에는 행사 동정과 함께 최병헌이 쓴 크리스마스 소개글이 실린다. 1898년에는 행사가 여러 곳에서 진행되었음을 보고하는 기사가 실린다.(9) 그리고 다음과 같이 장로, 감리 교회 이외의 곳에서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이야기하며 그 확장을 이야기한다.


“제물포 교회에는 조목사 내외분이 다 편치 못하므로 회당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교우들이 모여 구세 교회의 적십자기와 대한 국기를 달고 등불을 밝혀 경축하는 예식을 행하였고, 천주교 교인들도 종현 회당과 약현 회당에 등불을 굉장하게 달았으니, 우리 생각에는 대한 천지에도 성탄일에 기념하는 정성과 경축하는 풍속이 점점 흥왕할 줄로 믿노라.” (10)

1899년에는 크리스마스가 한국의 중요한 축일로 정착했다는 평가에 이르게 된다. “서울 성 안과 성 밖에 예수교 회당과 천주교 회당에 등불이 휘황하고 여러 천만 사람이 기쁘게 지나가니 구세주 탄일이 대한국에도 큰 성일이 되었더라”(11)는 신문 기사는 그러한 평가를 보여준다.
이처럼 1890년대 후반의 몇 년 사이에 크리스마스는 한국에 많은 곳에서 기념되는 날로 자리를 잡았다. 선교사들이 크리스마스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갖지 않은 것을 상기한다면, 이처럼 크리스마스가 급속히 보급된 것에는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수용 의지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선교사들이 크리스마스 보급을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은 찾기 힘들다. 그것은 한국인들의 필요에 의해 한국의 명절로 자리잡았다.


1) 한국에 가장 먼저 입국한 선교사 알렌은 1884년 12월 26일 일기에서 그 해 크리스마스에 대해 기록하였다. 본국에 있는 아내와 선물을 주고받은 이야기이다.

2) Brown, A. J., The Mastery of Far East,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 1919, p.506.

3) 내한 선교사들의 청교도적 성향에 관해서는 류대영, 『초기 미국 선교사 연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1, 제1부 제2장을 참조할 것.

4) 예를 들어 청교도들이 1649년에 채택한 케임브리지 강령에는 청교도를 ‘공공연하고 큰 추문’이 없는 자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추문에 속하는 것으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일, 부도덕한 행위, 탐욕, 머리모양이나 옷에 지나친 멋을 부리는 것, 술집에 출입하는 행위, 주사위로 점을 치는 일,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일 등이 포함되었다. (류대영, 앞의 책, p.114.) 청교도들의 크리스마스 금지가 미국에서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Nissenbaum, Stephen, The Battle for Christmas, New York: Alfred A. Knopf, 1997, 1장을 참조할 것.

5) “저는 방금 평양에서 (서울로) 내려왔습니다. 크리스마스를 처자와 함께 보내려고 합니다.” (그래함 리, “1895년 12월 27일 편지”, 『마포삼열 목사의 선교 편지(1890-1904)』, p.349.)

6) "선교본부에서 안식년 휴가를 떠나라는 허락이 와서 11월에 출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탄절에 맞춰서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사무엘 마펫, “1896년 9월 22일 편지”, 『마포삼열 목사의 선교 편지(1890-1904)』, p.412.)

7) “내일은 예수 그리스도에 탄일이라”라는 기사로 소개. (“1896년 12월 24일 기사”, 『독립신문』.)

8) “1897년 12월 29일 기사”,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897년 12월 28일 기사”, 『독립신문』.

9) 전년도에 배재학당의 풍경만을 보고한 데 반해서, 1898년에는 제물포 교회, 인천 담방리 교회, 강화 교향동 교회, 부평 굴재 회당의 행사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10) “1898년 12월 28일 기사”,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1) “1899년 12월 27일 기사”, 『대한크리스도인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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