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e Lévi-Strauss, "Father Christmas Executed," in Daniel Miller (ed.), <<Unwrapping Christmas>> (Oxford : Clarendon Press, 1993), 38-51. [원래 "Le Pére Noël supplicié," <<Les Temps modernes>> 77(1952년 3월)로 발표되었던 것을 기틴즈(Diana Gittins)가 영역(英譯)하여 싣은 것.]
1. 1951년 크리스마스 이브, 프랑스 디종(Dijon)에서는 산타클로스(산타의 불어 명칭은 “Pére Noël”이다. 이것을 영어로 옮기면 “Father Christmas”, 우리말로 옮기면 “크리스마스 신부님” 정도가 되겠다.)의 사형이 성당 앞에서 거행되었고 그 근처에서 화형까지 행해졌다. 산타클로스의 죄목은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기독교적 의미에서 벗어나 종교적 가치를 손상시켜서 그리스도의 탄신을 이교화(異敎化, paganization)시킨다는 것이었다. 둥지 안에 들어온 뻐꾸기 새끼처럼, 굴러들어온 녀석이 주인으로서 더 큰 자리를 차지하려고 행세한다는 비판이 가해졌다.
2. 크리스마스 신부(Father Christmas)가 비종교화의 상징이 되어버린 이 역설적인 사건에 대한 신문기사를 소개하면서, 레비-스트로스는 산타클로스가 프랑스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묻는다. 당시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영향으로 새로운 크리스마스 풍경들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산타클로스 복장도 그 중 하나로 백화점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을 “미국의 영향”이라고 설명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그의 대가다움이 발휘된다.
첫째, 미국의 풍습이 들어왔다고 해도, 그것이 미국에서 들어왔다는 것은 대중들에게 인식되지 않는다. 크로버(Kroeber)가 말한 자극전파(stimulus diffusion)가 일어나는데, 들어온 풍습이 융합된다기 보다는 촉매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어느 상인이 미국에 갔다가 크리스마스용 포장지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포장지를 만든다. 파리의 가정 주부가 가게에 갔다가 포장지가 눈에 띄어 구입한다. 그 주부는 그것이 미국 풍습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포장지는 “전부터 존재했지만 표현 수단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감성을 미적으로 충족시켜주고 표현해주는 것”이다.
둘째, 전부터 유럽에 존재했던 전승들(크리스마스 신부님, 성 니콜라우스, 산타클로스)이 최근에 합쳐져서 재창조되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옛 요소들이 합쳐져서 새로운 상징이 되었을 때 이것이 갖는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
3. 레비스트로스는 산타클로스를 ‘신’(gods)이라는 범주에 넣는다. 그는 어린이의 신이다. 그는 어른과는 다른 어린이의 위치를 표현해주는 신이다. 다시 말해 그는 통과의례와 입문식을 담당하는 존재이다. 어린이가 성장하기 전까지 어른들끼리 지키는 비밀이 있고, 그 비밀은 입문식 때 폭로되기 전까지는 지켜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산타클로스의 역할은 미국 서남부 원주민의 카치나(katchina)와 비견될 수 있다. 카치나는 전통 조상의 모습을 한 존재들로 어린이에게 벌을 주거나 선물을 준다. 어린이가 클 때까지 그것이 변장한 어른임은 밝혀지지 않는다. 산타클로스는 바로 이 ‘비밀’과 관련된 존재이며 어린이에 대한 교육적 기능을 수행한다.
4. 더 나아가 레비스트로스는 삶과 죽음이라는 이원적 세계와의 관련성을 통해서 심층적 의미를 분석한다. 어린이는 성인이 되지 않은 이, 통과 의례를 거치지 않은 이이며, 상징적인 차원에서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 영역, 조상들의 세계에 속한다. 사투르날리아 축제에서 연원하는 중세 유럽의 크리스마스는 죽음의 영역과 삶의 영역 사이의 충돌이 매개되는 현장이었다. 간단히 말해 중세 크리스마스는 바보제, 가짜왕(Lord of Misrule)의 성격이 강한 전도(顚倒)의 축일이었고, 죽음의 세계를 대변하는 어린이들은 돌아다니며 어른들을 위협하는 악한(惡漢)의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근대 크리스마스가 형성되면서 어린이 영역의 불온함은 순치(順治)되었다. “부모에 대한 아이들의 공개된 공격 대신에, 이제 부모들은 가짜 수염 뒤에 숨어서 친절함으로 아이들에게 상을 준다.”(48) “크리스마스의 ‘광란’은 이제 사라졌다. 동시에 그것은 약화되어 나이트클럽에서 어른들이 펼치는 향연(Réveillon), 타임 스퀘어 광장에서의 성 실베스테르의 밤(신년 전야를 성 실베스테르의 축일이라고 부른다.)에 잔존해 있을 뿐이다.”(48) 영미권에서 중세 크리스마스의 어린이 세계가 가졌던 난폭함은 두 극단으로 나뉘어 보존되고 있다. “한쪽은 어린이가 죽은 이의 역할을 하면서 어른들에게 무언가를 달라고 하는 할로윈이고, 다른 한쪽은 어른들이 아이들의 생생함을 축하하며 떠받들어주는 크리스마스이다.”(49)
** 작은 현상에 대한 대가의 분석의 힘을 보여주는 글이라고 생각된다. 처음 읽을 때는 크리스마스에서 아이와 어른의 대립을 죽음과 삶의 영역으로 나누는 분석은 지나치게 스케일이 큰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었지만,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형성 역사, 그리고 중세 크리스마스와의 차별성을 생각해보면 들어맞는 설명이 많았다.
2번 부분에서 산타클로스를 카치나에 비교한 것은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산타클로스의 사회적 역할이 무엇인지를 이보다 적절히 집어내어 보여줄 수가 없다. 산타클로스와 카치나는, 미국에서는 부기맨(Mr. Bogeyman)의 자리, 우리나라에서는 망태할아버지의 역할에 해당한다. 전에 똑순이의 “울면 안돼” 노래에 5공의 억압적 정서가 묻어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산타클로스의 사회적 역할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선물을 주는 존재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어르고 때로는 훈육하여 교화시키는 역할을 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