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자료/교리

기독신보 1931년 7월 사설들

방가房家 2009. 1. 11. 22:26
신문읽는 모임에서 1930년대 기독교 신문을 읽고 있다.  1931년 7월달에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반응들이 좀 있다.  일단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 문제.  이것은 몇 해 전 강의석 군이 제기한 문제와는 비슷한 면도 있지만 좀 다른 이야기인데, 학교에서 종교 과목을 고집하면 일제의 교육 정책 아래서는 학교의 자격이 제대로 된 고등학교로 인정되지 않아 상급학교로의 진학에 문제가 생긴다.  학생들의 앞날이 달린 문제이기에 목숨걸고 투쟁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고, 종교학교 교장인 선교사들은 ‘내가 이 학교 선교하러 세운 건데, 그걸 포기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버티는 상황. 

 


당시 기독교를 겨냥한 사회주의자들의 반종교운동에 대한 반대 사설에도 전형적인 보수층의 논리가 보인다.  사회의 문제는 인정하지만 그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폭력은 안 되며 민중이라는 주체는 우민(愚民)이므로 문제가 있다는, 역시 나이브하지만 현재까지도 이어오는 보수층의 논리들의 집약이다. 

만보산 삼성보 사건에서 유래한 한국 내 중국인들에 대한 폭동에 대한 사설은 실제로 일어난 참상을 될 수 있는 한 축소한다.  ‘불상사’에 대한 사회 각계의 유감과 위로의 움직임을 전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이 할애되어 있는 반면에 불상사의 내용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스도 정신을 강조하며 이참에 중국 선교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결론은 생뚱맞다.
 
 

<基督申報> 사설/ 방원일(06.9.18)
 
1931년 7월 1일 (제16권 제27호/제813호)
분류: 사설제목: 敎育界의 不祥事
(一)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확장하는 투쟁인데, 그리스도교의 정신으로 보아 그 목적은 찬성하나 그 방법인 파업(스튜라익)은 크게 불가하다.  그리스도는 노사간 균등하게 지낼 것을 가르쳤는데, 그리스도인은 그 중 어느 한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의와 사랑을 전함으로써 불상사를 막도록 노력한다.  (二)교육 사업은 그리스도의 무사를 길러내 그리스도 왕국의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인데, 최근 여러 학교(여자상업, 동덕, 보성, 송고, 영생, 이화, 그리고 시골 보통학교까지)에서 동맹휴학이라는 불상사가 있었다.  노사간에나 쓰는 무기를 학생들이 쓰게 된 것에는 사제간의 도덕과 사랑이 결여된 까닭이다.  (三)종교학교의 파업 조건은 대개 선생을 배척하고 종교의 과목을 빼라는 것이다.  목적을 관철할 여러 방법이 있는데 파업을 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으며, 종교학교에서 종교 공부를 안 하겠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四)사제 간의 윤리를 되살려라.
 
1931년 7월 1일 (제16권 제27호/제813호)
제목: 反宗敎運動과 우리의 主張(六)
필자: 崔錫柱
五. 유물론적 사회운동의 결함(이어서) -(2)그들은 이기주의자들로, 자기 주의만이 제일이고 자기만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루한 바리새인보다 더하다.  (3)그들은 폭력을 온갖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 전부로 생각한다.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문제를 일으키는 폭력을 가지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운동 방법으로 삼은 것은 자기모순이다.  인류사에서 폭력은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남겼을 뿐이고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 것은 위인들의 업적들이다.
六(<-五). 우리의 主張 -우리의 주장은 이론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한 것인데, 종교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교를 통해 현재에 만족하고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물론자는 변화가 전부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진다고, 즉 환경만 갖추어지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변화의 근본이 내부 개혁에 있다고 주장한다.
 
1931년 7월 8일 (제16권 제28호/제814호)
분류: 사설
제목: 夏期兒童 聖經學校
(一)하기아동 성경학교 운동은 1872년 캐나다에서 시작되어 1910년 경 미국에서 부흥하였으며 우리나라에는 1922년 선천에서 삼우엘 부인이 개교한 것이 효시가 되어 불과 9년 사이에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二)이 운동이 방방곡곡에 미칠 정도로 발전하려면, 인력과 물질이 필요한데, 이는 운동 실무자들이 개시 이전에 각 교회, 종교단체, 학교, 신문잡지와 협조한다면 해결될 수 있다. (三)운동의 목적을 잊지말고, 창조적으로 하고, 미신적인 방법을 쓰지 말며, 생명의 힘으로 진행할 것.
 
1931년 7월 8일 (제16권 제28호/제814호)
제목: 反宗敎運動과 우리의 主張(七)
필자: 崔錫柱
六. 우리의 主張-(1)사회개조는 개인 혁명에서 되어가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는 민중만이 제일이라고 하고 특출한 개성의 존재를 부인하니 자멸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 없는 평등주의는 무수한 우민들을 지어내고 하나님있는 데모크라시는 무수한 천재를 지어낸다. (2)사회주의는 폭력이라는 무기로 싸우기를 가르쳐왔으나, 우리의 방법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다.  (3)진정한 운동은 자기를 제물로 내어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원칙에 의지해야 한다.
七(<-六). 맛치는 말-현재의 불완전한 조직을 기회삼아 사사로이 배를 불리고 동포와 인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는 자본가든, 종교가이든, 사회주의자든 망할 것이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함에는 ‘하나님 있다’는 믿음 위에 터를 세우고 사랑과 십자가의 법칙으로만 인류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
 
1931년 7월 15일 (제16권 제29호/제815호)
분류: 사설
제목: 中國人에 대한 우리의 態度
(一)중국과 우리는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등질 수 없는 이웃이다.  중국에서 생활하는 동포가 백만이요 조선땅에 들어와 사는 중국인이 팔만을 헤아린다.  (二)이번 만보산 삼성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우리 동포들이 조선 안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불상사를 끼쳤다.  곳곳에서 큰 소동을 일으키고 중국으로 돌아가게 하기도 했다.1) 각계의 유지들이 이에 대해 유감의 성명을 발표하고 위문품을 모았다.  (三)이 불상사를 계기로 더 서로를 이해하고 믿음과 의를 회복하기를 바란다.  (四)그리스도의 정신이 통하였던들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는가. 산동과 만주의 선교가 더 중히 보인다.  두 민족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실현하기를 바란다.
 
1931년 7월 15일 (제16권 제29호/제815호)
제목: 니젓는가 일헛는가
필자: 채필근
一. 무엇을 -우리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별명이며 우주의 원리며 생명의 근원이며 사람의 본성이며 사회의 실질이며 도덕의 표준이며 진리의 자체며 종교의 신수(神髓)며 그리스도의 정신이며 성령의 강령이다.
 
1931년 7월 22일 (제16권 제30호/제816호)
분류: 사설
제목: 필자와 독자 (上)
(一)필자와 독자가 서로를 위하여 있다는 입장과 필자는 독자이고 독자는 필자라는 입장 양 쪽 이론을 모두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하겠다. (二)글쓰기에서 배척해야 할 것은 인간의 동물적 감정을 이용하여 인간 본유의 고상하고 거룩한 감정을 썩이는 가인파 문학이다.  우리가 한사코 할 것은 인간의 고상한 감정을 흥기시키고 거룩한 생영을 움직이어 그 생명이 하나님의 천지에서 활약할 수 있게 만드는 아벨파 문학, 즉 거룩한 문학이다.  (三)악한 붓을 물리치고 거룩한 붓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글을 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1931년 7월 22일 (제16권 30호/제816호)
제목: 니젓는가 일헛는가 (二)
필자: 채필근
二. 조흔선생의 니아기 -성질이 완강한 한 학생을 스스로 뉘우치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부덕을 꾸짖었던 선생님과, 그 사정을 알고 선생을 찾아간 아버지와 뒤늦게 뉘우친 학생 셋이서 뒷산에서 만나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는 이야기.
 
1931년 7월 29일 (제16권 제31호/제817호)
분류: 사설
제목: 필자와 독자 (下)
(一)독자는 읽어서 해될 것과 읽어서 도움이 되는 것을 가려 읽어야 한다.  (二)읽는 것에는 생의 진취와 윤택과 가치를 창조하는 힘이 있다.  (三)우리는 다독하되 선택할 것이며, 우리말로 출판된 것 중에 읽을 것이 없다고 단안하지 말 것이며, 또한 자자구구를 정성들여 정독할 것이다.
 
1931년 7월 29일 (제16권 제31호/제817호)
제목: 예수의 罪惡觀
필자: 金弼秀
죄의 원인은 자아를 남용함에서 비롯한다. 죄의 발생은 가정, 즉 아담과 하와 부부간으로부터 종인(種因)하여 전세계에 파급되었다.  하와는 여자의 본분을 지키지 않았으며 아담은 정견이 없는 남자라 하겠다.  죄에 대해서는 공의를 엄정히 집행하면서도 사람은 살리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가 죽음에 이르렀으니, 죄인이 예수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 예수의 죄악관은 ‘죄는 미워하시되 인간은 사랑하시다’로 결론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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